[청춘리포트] 대학 안 가고 취업 성공해 뿌듯 … 그래도 ‘캠퍼스 로망’ 남아 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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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특성화고 나와 사회생활 직행한 5인

471개교, 28만7721명. 전국에 있는 특성화 고등학교 수와 특성화고에 다니는 학생 수입니다. 특성화고라는 용어가 낯설다고요? 옛날의 실업계고를 떠올리면 됩니다. 정부는 2012년부터 실업계고를 포함한 모든 전문계고를 특성화고로 통합 관리하고 있습니다. ‘학생 개개인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학교’라는 게 정부 설명입니다.

뷰티고 → 미용사, 김현아 #강사 하고 싶어 이론도 열심히 공부 #금융고 → 은행원, 김은지 #자격증 6개, 빚 안지고 돈 벌어 떳떳 #국제통상고 → 공기업, 정상인 #고졸자 우대 역차별? 말도 안되죠 #조리과학고 → 식품연구원, 이수현 #내가 사는 방식은 내가 정하는 것 #공업고 → 기술 공무원, 김승원 #대학 대신 필요한 자격증 공부할 것

졸업식의 계절인 2월, 특성화고 3학년 학생들도 졸업 꽃다발을 안았습니다. 지난 3년간 이들은 목표한 직업을 가지려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이제 갓 스물, 이들은 대학 캠퍼스의 낭만 대신 곧바로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그 못잖게 대학에 대한 환상이나 소위 말하는 ‘고졸 딱지’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그동안 대학에 간 친구들이나 ‘대학 안 가도 괜찮겠느냐’며 우려 섞인 눈빛을 보내던 어른들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이들의 속내를 들여다봤습니다.(※본지는 특성화고 졸업 후 곧바로 취직한 5명의 인터뷰를 각각 진행한 뒤 이들의 이야기를 대화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자기 소개

우리은행 공항금융센터에 취직한 김은지씨. 선배들이 입사 축하 화환을 보냈다. [사진 김은지]

우리은행 공항금융센터에 취직한 김은지씨. 선배들이 입사 축하 화환을 보냈다. [사진 김은지]

서울금융고 김은지(19·이하 금융고 김): 회계과를 졸업하고 지난해 11월 우리은행에 취업했어요. 인천공항에 있는 우리은행 공항금융센터에서 환전 업무를 맡고 있습니다.

경기국제통상고 정상인(19·이하 정): 저도 회계과를 졸업했습니다. 지난해 한국지역난방공사에서 3개월 인턴 기간을 거친 뒤 10월에 정직원이 됐어요.

한국조리과학고 이수현(19·이하 이): 지난해 11월 식품회사 ‘오뚜기’ 자회사인 ‘조흥주식회사’에 식품개발연구원으로 취직했습니다.

송파공업고 김승원(19·이하 송파공고 김): 지난해 서울시교육청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10월에 임용됐습니다. 지금은 서울시교육청이 주관하는 공사에서 전기 설비 설계도를 검토하고 공사 현장을 감독합니다.

한국뷰티고 김현아(19·이하 뷰티고 김): 전 미용사가 됐어요. 지난해 11월부터 대형 미용실 브랜드인 ‘아이디 헤어’의 일산지점 중 한 곳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특성화고를 가게 된 계기

김현아씨는 미용실 ‘아이디 헤어’의 헤어디자이너다. 어릴 적 꿈을 이뤘다. [사진 김현아]

김현아씨는 미용실 ‘아이디 헤어’의 헤어디자이너다. 어릴 적 꿈을 이뤘다. [사진 김현아]

뷰티고 김: 어렸을 때부터 미용사가 되고 싶었어요. 중학교 때 문방구에서 파는 가위로 친구들 머리도 다듬어줬죠. 입시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중학교 2학년 때까진 내신이 상위 70~80% 수준이었는데, 선생님이 ‘이 성적 가지고는 뷰티고에 못 간다’고 하시는 거예요. 충격을 받아서 3학년 때는 상위 40%까지 내신을 끌어올렸습니다.

금융고 김: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결심했어요. 은행원이 되고 싶었는데 대학까지 마치면 ‘멀리 돌아간다’는 느낌이었어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아닌데 등록금 몇천만원씩 빚지면서 대학에 갈 필요가 있을까 싶었고요.

송파공고 김: 저도 비슷해요. 솔직히 일반고에서 좋은 대학에 갈 자신이 없었어요. 대학 나와도 ‘인 서울’이 아니면 인정받기 어렵잖아요. ‘어중간하게 해서 등록금만 낭비하느니 기술이라도 배우자’는 생각에 특성화고에 온 거죠.

정: 저는 사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어요. 전교 2등 정도? 그런데 수능을 잘 볼 자신이 없었어요. 3년 동안 공부한 걸 하루에 다 쏟아낸다는 게 두려웠던 거죠. 특성화고에 가겠다고 말씀드리니 부모님께서는 무척 반대하셨어요. 애초 조건은 특성화고에서 내신을 잘 받아서 대학을 가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1학년 때 고졸로 산업은행에 들어간 선배를 만났는데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때 ‘굳이 대학 안 가도 되겠다’고 결론내렸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

식품개발연구원이 된 이수현씨가 치킨요리에 들어갈 조미료를 만들고 있다. [사진 이수현]

식품개발연구원이 된 이수현씨가 치킨요리에 들어갈 조미료를 만들고 있다. [사진 이수현]

금융고 김: 저 정말 열심히 했어요. 기본적으로 금융 기초지식을 쌓고 회계 원리를 배우는데 매일 밤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했어요. 관련 자격증만 6개 땄고요. 고3 때는 취업 공고가 뜬 회사 정보를 싹 다 조사하고 조직도까지 달달 외웠어요. 면접 준비할 때는 질문 200개가 담긴 질문지를 만들고 온갖 답변을 달아뒀습니다.

뷰티고 김: 저도 마찬가지예요. 미용실에서 일하려면 미용사 자격증이 필요하거든요. 전 미용 강사 일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론 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학교 안에 뷰티숍이 있는데, 거기서 동네 주민들이나 선생님들 머리를 해주며 실전 경험도 쌓았습니다.

송파공고 김: 전 고1 여름방학 때부터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방학 없이 2년 정도 했네요.

정: 특성화고에서는 일반고에서 접할 수 없는 기회가 많아요. ‘경기도 상업정보능력경진대회’라고 회계 지식을 겨루는 경진대회가 있는데 고2 때는 거기서 1등도 했습니다. 특성화고에 왔다고 해서 누구나 취업을 잘하는 건 아니에요. 취업 재수생도 많고 군대로 가는 애들도 있죠. 하지만 본인만 열심히 한다면 충분히 자기 꿈을 펼칠 수 있어요.

#대학에 대한 로망, 아쉬움

지역난방공사에서 일하는 정상인씨. [사진 정상인]

지역난방공사에서 일하는 정상인씨. [사진 정상인]

정: CC(캠퍼스 커플), MT…. 대학 캠퍼스에 대한 로망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웃음). 아직 그 부분을 해소할 방법은 못 찾은 것 같아요.

금융고 김: 맞아요. 솔직히 아쉬움은 매우 커요. 그럴 때마다 저는 대학에 갔을 때 지게 될 3000만원의 빚을 생각해요. 남들이 대학 가서 등록금을 낼 동안 저는 더 큰 돈을 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잡힙니다.

이: 친언니가 대학에서 춤 동아리를 하는데 부러워서 공연 때마다 쫓아다녔어요. 아직도 극복은 못했어요. 언젠가는 꼭 대학을 갈 생각이에요. 누군가는 ‘그럴 거면 대학을 갔다가 취업하는 게 낫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전 취업 후에 어떤 공부가 필요한지 몸으로 느끼고 싶었어요. 식품연구소에 있다 보니 주변에 석·박사 학위가 있는 분도 많고, 요리 외에 화학이나 식품위생법 관련 지식도 필요하다고 느껴요.

#‘고졸’이라는 편견

송파공고 김승원씨가 만든 회로도. [사진 김승원]

송파공고 김승원씨가 만든 회로도. [사진 김승원]

송파공고 김: 주위에서도 ‘한국에서 살려면 대학에 가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많이 해요. 그래선지 취업 직후만 해도 일하다가 대학에 가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필요한 자격증만 공부해서 따면 되지 꼭 대학에 가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대졸자분들과의 월급 차이가 꽤 커요. 물론 지식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하지만 가끔 제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는지 “아가야”라는 식으로 대할 때는 서운하기도 해요.

금융고 김: 전 회사에서는 한 번도 편견 같은 걸 느낀 적이 없어요. 하지만 여기만 벗어나면 ‘넌 고졸이야’라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걸 알기에 두려움도 있습니다. 전 중학교 때는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는 정말 열심히 했고 잘했거든요. 그저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한다’고 봐줬으면 좋겠는데 아쉬움이 커요.

정: 맞습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고졸 취업자 우대는 대졸자에 대한 역차별이다’ 같은 시선이 많더라고요. 열심히 해서 취업한 고졸들은 그 나이 때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한 거예요.

이: 특성화고 진학이나 고졸 취업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길을 정말 추천하고 싶어요. 내가 사는 방식은 내가 정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 정해주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게 중요해요.

윤재영 기자 yun.jaey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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