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슬픈 '핑계' 공화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 논설위원

양영유논설위원

밀레니엄 열기로 세계가 들썩이던 1999년 12월 31일 러시아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건강 문제와 후진 양성을 이유로 사임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의 몰락은 예견됐었다. 러시아 공화국 최초의 직선 대통령으로서 한때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각종 부패 의혹과 불법행위에 알코올 중독설까지 겹쳐 국민의 신뢰도가 6%대로 곤두박질쳤다. 그러자 ‘건강상 이유’를 핑계로 사임해 신변을 보장받으려 한 거다. 후계자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결과적으로 옐친의 핑계는 절묘한 한 수가 됐다.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은 모두 핑계의 동물이다. 일상 중 선의의 핑계는 때론 삶의 윤활유가 되기도 한다. 반면 권력가의 악의적 핑계는 국가와 개인의 운명을 구렁텅이에 빠뜨린다. 심리학자 브리기테 로저는 『핑계의 심리학』에서 “사람들은 진실을 왜곡하려 할 때 의식적으로 핑계를 늘어놓는다”고 했다. 쏟아지는 책임·비난·벌을 모면하려고 핑계로 무죄를 입증하려 한다는 얘기다. 핑계는 거짓말의 한 형태인데 핑계가 핑계를 낳다 보면 큰 화(禍)가 된다는 설명이다.

우리 국민은 반만년 사초(史草)에도 없을 그런 황당한 핑계를 듣고 있다. 국정 농단 세력들이 사죄는커녕 ‘네 탓’ 핑계만 대니 억장이 무너진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핑계꾼’이다.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밑으로 내리고, 밑에서 올라온 보고를 위로 올리는 가교 역할만 했다”고 둘러댔다고 한다. “최순실은 전혀 모른다”고 또 잡아뗐다. 제 한 몸 건사하려 천하제일의 ‘무능 심부름꾼’임을 자처했으니….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핑계는 더 아리다. “시녀처럼 심부름이나 하던 사람이다. 사익 추구나 국정 개입 사실을 몰랐다” “(대통령이) 배신 트라우마가 강해 내게 의지했다. 그래서 쉽게 곁을 떠나지 못했다”며 책임을 핑퐁한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다.

악의적 핑계에는 꼼수와 거짓 기제가 작동한다. 김기춘·안종범·조윤선·정호성 등 국정 농단 피의자 30여 명이 내뱉은 온갖 핑계가 그렇다. 헌법 제1조를 ‘대한민국은 핑계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핑계권은 우리(국정 농단 세력)에게 있고, 모든 핑계는 우리로부터 나온다’고 바꿔 외친 듯하다. 우울증에 빠진 국민의 건강상 이유에서라도 슬픈 핑계공화국을 끝내야 한다. 그런데 최초의 과반 득표 직선 대통령이지만 지지도가 5%대로 떨어진 그분은 오늘 헌법재판소 최종변론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게 장고 끝의 한 수일까.

양영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