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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정유년의 동아시아 국제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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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설명절과 보름을 거치면서 명실 공히 정유년(丁酉年)을 느낀다. 금년은 12지 간지로 60년 만에 찾아오는 정유년으로 420년 전 정유재란(1597)의 7주갑이 되는 해이다. 얼마 전 한국의 KBS에서 ‘임진왜란 1592’ 라는 TV 드라마를 방영하여 임진왜란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임진왜란(1592-1596)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유재란(1597-1598)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의 일부로 생각하여 관심이 많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임진왜란은 일본군에 의해 침략을 당한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일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 낸 승리의 전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은 정유재란 중에 일어난 전쟁이다.

1592년 4월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20만 명의 일본 육군을 부산에 상륙 한양(서울)을 향해 북상시키고 수군으로 하여금 보급물자를 싣고 남해와 서해를 돌아 강화도와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들어가게 하는 계획을 세웠다.

일본 육군은 계획대로 파죽지세로 북상하였으나 수군은 한산도 해전 등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대패하고 만다. 한반도 육지의 지형은 첩자에 의해 파악되었으나 남해안의 양(梁)이라는 조류가 빠른 좁은 수로에 대해 사전 지식이 부족하였다.

육군은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조총이란 개인 화기로 우세하였지만 수군은 거북선 등 특수전함과 천자(天字) 또는 지자총통(地字銃筒) 등 조선의 화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활약으로 제해권을 유지한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서진을 막고 있었다. 한양을 함락시키고 평양성까지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수군에 의한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조명(朝明)연합군의 반격으로 평양성을 지키지 못하고 한양으로 퇴각한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은 휴전협상을 제의하고 1593년 4월 점령지 한양을 버리고 전군을 남하시켜 울산의 서생포(西生浦)에서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 협상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러한 교착 상태는 4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일본과 명은 협상에 진전이 없자 상대가 항복하였다면서 자신들의 조정을 속이기로 결론을 내고 협상을 종결시켰다. 명의 대표 심유경(沈惟敬)은 만력제(萬曆帝)를 속였으나 일본 대표 고니시는 도요토미를 속이는 데 실패하였다. 협상의 진실을 알게 된 도요토미는 크게 분노하여 재침을 명령한다. 해가 바뀌어 정유년(1597)년 1월 15만의 일본군을 다시 조선 침략에 투입한다.

정유재란과 남해안 왜성

임진왜란이 경상도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전라도(호남) 전쟁이라고 한다. 조선 재침을 명령한 도요토미는 반드시 전라도를 점령할 것을 강조하였다. 임진년의 실패는 군량미 보급을 위한 한반도의 곡창 호남 점령의 실패로 분석되었다.

‘호남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을 것이다(若無湖南 是無國家)’ 신념으로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의 호남 진입을 막았다. 육지에서는 김시민 장군이 호남의 관문 진주성에서 일본군을 좌절시켰고, 북으로는 전주 인근의 이치(梨峙) 전투에서 권율 장군이 일본군을 대패시켰다.

일본군은 재침하자마자 정보전을 통해 조선 조정을 교란시켜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는데 성공한다. 일본 수군은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을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대패시키고 일거에 남해안의 제해권을 확보 전라도를 통한 한양 진격에 나선다.

일본군은 계획대로 남원과 전주성을 함락 호남을 점령하였으나 충청도 직산에서 조명연합군에 의해 북상이 저지되었다. 임진년과는 달랐다. 조선은 귀순한 왜군(降倭)의 도움으로 신무기 조총제작에 성공하였고 명나라로부터 본격적인 지원군이 파견된 상황이었다.

전쟁이 뜻대로 안되자 일본군은 전라도를 중심으로 양민을 납치 학살하고 전승의 증거로 코와 귀를 베어가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본 교토(京都)의 귀무덤(耳塚)은 대부분 전라도에서 베어 온 코와 귀를 묻은 곳이라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정유재란을 큰 재앙을 가져다 준 정유재란(丁酉災亂)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유재란의 승기를 잡은 명량해전

1597년 음력 9월 전사한 원균에 이어 이순신 장군은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다. 이순신 장군은 명량(鳴梁)해전에서 소수의 배로 133척의 적선을 막아내는 기적적인 승리로 일본군을 다시 공포에 떨게 하였다. 사실 선조는 원균에 의해 수군이 궤멸된 것을 전해 듣고 수군의 해체를 지시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유명한 장계로 선조를 설득했다.

이순신 장군은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하면 살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라는 리더십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명량해전은 2014년 영화화 되어 1761만여 관객을 동원, 당시 세월호 참사로 집단 우울증과 절망감에 빠진 한국 국민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고 한다.

제해권을 빼앗긴 일본군은 서울 진격을 포기하고 유사시 퇴각하기 유리한 남해안에서 왜성(倭城)을 쌓고 군사력 방어에 치중하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왜성에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사천왜성에서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왜성에서 각각 장기 농성을 도모하였다.

정유재란 전적지 탐방

명나라는 병부상서 형개(邢?)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육군은 조선의 권율 장군, 수군은 이순신 장군과 각각 연합육군과 연합수군을 결성, 농성중인 일본군을 공격하는 ‘4로병진(四路竝進)’의 전법을 구사하였다.

마귀(麻貴)를 울산왜성을 공격하는 동로(東路) 사령관, 동일원(董一元)을 사천왜성을 공격하는 중로(中路) 사령관, 류정(劉綎)을 순천왜성을 공격하는 서로(西路)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수로(水路) 사령관인 진린(陳璘)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광양만 해전에 투입하였다.

지난 해 말 필자는 정유재란의 현장인 순천왜성과 노량해전의 전적지를 살펴보는 역사탐방의 기회를 가졌다. 우리 일행은 버스로 서울을 출발 4시간여 만에 순천에 도착하여 일박을 하였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명연합 육군의 사령부가 있었던 검단(劍丹)산성을 올랐다. 백제시대 쌓은 산성의 일부인 검단산성은 해발 138m의 야산으로 버스에 내려 산성까지는 도보로 20분정도의 거리였다.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도원수 권율 장군과 명나라 류정 장군이 지휘하던 서로(西路) 사령부를 상상하면서 동남쪽으로 바라보니 2.7km 떨어진 광양만이 펼쳐진다.

광양만과 함께 고니시가 축조한 왜성의 잔재도 보였다. 기록에 의하면 왜성은 바다로 둘러 싸였다는데 모두 매립되어 산업단지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육지의 일부가 되었지만 순천왜성과 가까운 광양만의 장도(獐島 노루섬)에는 광양만 해전을 지휘하고 고니시군의 출로를 봉쇄한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진린 제독의 수로 사령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소재 순천왜성으로 내려갔다. 왜성을 축성할 때 고니시는 인근 야산의 흙을 파내어 축대를 쌓고 해자(垓字)를 만들어 바닷물을 끌어넣었다. 순천왜성은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인 형태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근세 성곽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해자 위에 다리를 놓아 밤이면 다리를 끌어 올려 왜성을 섬처럼 만들었다. 순천왜성이 다리가 보이는 왜교성(倭橋城) 또는 끌어 올리는 다리가 있는 예교성(曳橋城)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고니시의 특별한 축성에 기인한다. 순천왜성은 외곽의 산노마루(三の丸) 니노마루(二の丸)와 함께 중심이 되는 혼마루(本丸)와 천수각이 축조되었다.

천수각은 우리나라 성곽에 없는 일본 특유의 구조물이다. 16세기 전국(戰國)시대의 일본을 찾아 온 그리스도 선교사의 영향으로 교회의 천주당 모양으로 지어 처음에는 천주각(天主閣)으로 불리었다가 천수각(天守閣)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의 무장들은 축성할 때는 주변을 관찰할 수 있는 망루 역할을 할 수 있는 천수각을 반드시 지었다.

순천왜성은 여수반도의 좌우 광양만과 순천만을 연결하는 잘록한 허리에 축조된 성으로 바다와 육지를 양쪽에서 막아내는 천혜의 지리적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다. 순천왜성은 직산 전투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고니시 군대는 구례를 거쳐 순천에 내려 와 성을 쌓기 시작했다.

일본군 1만 3천 여 명이 주둔했다는 순천왜성의 건물은 물론 남아 있지 않지만 성의 진입로와 천수각 기단은 보수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 높은 곳의 천수각 기단에서 올라서니 광양만이 한 눈에 들어 왔다.

악명 높은 고니시는 오사카(大阪) 근처 사카이(堺)의 약재장사의 아들로 태어나 무장이라기보다 상인이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기독교 교인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세스페데스’ 스페인 신부를 종군시키기도 하고 싸우는 것보다 협상에 능하여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을 주관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철군과 노량해전

일본군이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방어에 진력하는 사이 해가 바뀌어 1598년 8월 도요토미의 사망소식과 함께 전군 철수의 명령을 받는다. 고니시는 안전한 철군을 위해 육지에서는 류정 장군, 바다에서는 진린 제독에게 뇌물을 주어 협조를 요청한다.

류정과 진린은 고니시의 무혈 철군을 보장하려고 하였는지 모르지만 이순신 장군의 강력한 반대로 조명연합군은 광양만을 봉쇄하고 고니시 군대의 철군을 막았다. 고니시는 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인근 사천왜성의 시마즈 군대의 엄호지원이 필요했다. 시마즈 군대는 고니시의 철군을 지원하기 위해 광양만으로 향하였다. 광양만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좁은 수로인 노량(露梁)을 통과해야 한다.

광양만에서 퇴로를 막고 있던 진린 제독과 이순신 장군은 일부 봉쇄를 풀고 노량에서 멀지 않은 남해 관음포(觀音浦)에 매복하여 시마즈 군대의 노량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자정을 넘긴 야음을 타서 시마즈 군대가 노량으로 진입하였다. 조명연합수군은 시마즈 군에 일제히 공격하였다. 새벽부터 시작된 전쟁은 한낮이 되어서야 시마즈 군이 많은 전사자를 버리고 퇴각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등자룡 대교’와 정유년 합동 진혼제

전쟁의 와중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유탄(流彈)을 맞아 쓰러졌다. 적의 포위에 빠져 전사하게 된 진린 제독의 부장 등자룡(鄧子龍) 장군을 구출하기 위해 나섰다가 유탄을 맞았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쓰러지면서 “전황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겼다.

진린 제독은 이순신 장군의 전사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그의 공적을 “천하를 경륜할 인재로 그의 전공은 하늘을 메울 만큼 크다(有經天緯地才 補天浴日之功)”고 명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진린 제독의 후손 3000명 정도가 광동 진(陳)씨로 살고 있다. 명이 망하자 청(淸)군의 추적을 받은 진린 제독 손자가 조선으로 망명하여 일가를 이루었다고 한다.

조명연합수군과 시마즈 군이 싸우고 있을 때 고니시 군은 여수 앞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빠져 나가 일본으로 달아났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등자룡 장군을 포함하여 이름 모를 조선과 명의 수군 그리고 침략군인 일본의 수군이 전사하였다.

우리 일행은 남해 고속도로를 통해 광양만 위에 건설된 이순신 대교를 건너 경상도로 향했다. 버스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섬진강 다리를 건너 노량해전의 전적지 노량대교를 건넜다. 노량은 ‘대성운해(大星隕海)’라는 말 그대로 큰 별이 떨어진 곳이다.

다리를 건너면 남해 충무사가 나온다. 이순신 장군의 가묘를 모신 곳이다. 고금도(지금의 완도)에 장군의 시신이 옮겨 가기 전에 일시 머문 곳이라고 한다. 조명연합수군이 기습을 위해 전함을 숨겨 둔 남해의 관음포로 갔다. 인근의 전망대에서 보면 멀리 광양만과 순천왜성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것 같다. 남해와 순천이 전연 딴 곳처럼 생각했는데 같은 바다임을 알 수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순직한 노량해전은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 해전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를 계기로 광양만을 가로 지르는 2개의 대교가 건설되었다. 하나는 ‘이순신 대교’이지만 하나는 광양만 묘도(猫島 고양이섬)의 이름을 따서 ‘묘도 대교’로 부르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영웅적 순국과 함께 칠순의 나이에 이국(異國)의 겨울바다에서 목숨을 던진 등자룡 장군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묘도 대교’를 순직 420주년이 되는 내년(2018) 한 해만이라도 ‘등자룡 대교’로 부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현지에서 만난 향토 사학자들은 420년 전 한중일 동아시아 국제전에서 숨진 조선 중국 일본 병사들의 후손들이 한자리에 모여 그들 선조들의 고혼을 위해 합동 진혼제(鎭魂祭)를 올리는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서 용감히 싸운 조선 병사와 함께 이국의 땅에서 지원군 또는 침략군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이름 없는 병사들을 위한 진혼제이다.

정유재란 때 희생된 병사들을 위해 금년 정유년에 길일(吉日)을 잡아 합동 진혼제를 올려 한중일 삼국의 희생자 후손들이 화해의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뿌듯하다. 420년 만에 정유재란을 재조명하면서 한중일 삼국이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 평화와 번영의 미래 건설을 바라는 마음을 안고 서울로 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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