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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물감칠, 수십 차례 사포질 … 이 그림의 정체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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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전시장의 신작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화가 이상남.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매일같이 작업실을 찾아 8시간씩 일하곤 한다. 전민규 기자

전시장의 신작 앞에서 포즈를 취한 화가 이상남. 뉴욕에서도, 서울에서도 매일같이 작업실을 찾아 8시간씩 일하곤 한다. 전민규 기자

해사한 색채가 일렁이는 큼직한 화폭이 제일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형태를 짐작하기 어려운 일렁임에 다가서면 정교하고 섬세하게 그려진 기하학적 도상이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 저 그림에서 도상을 하나씩 뜯어보면 비밀스런 고리 같기도, 공장의 배선이나 설계도 같기도, 건축적 문양 같기도, 우주를 향한 기하학적 신호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같기도’일 뿐 같진 않다. 어떤 상상을 들이대도 화가 이상남(64)은 빙그레 웃는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게 재미있죠. 그런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서 제가 퍼포먼스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상남 개인전 ‘네 번 접은 풍경’ #날렵한 선이 빚어낸 중첩된 형상 #설계도? 건축 문양? 일종의 기호?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게 재미” #감정이 절제된 건축적 회화 주역

수백개 도상은 그의 전매특허와도 같다. 자연의 모방이 아니다. 문명을 비롯, 모든 인공적인 것에서 출발한 도상, 이를테면 ‘인공의 정물화이자 풍경화’다. 머리로 해석하거나 말로 옮기는 대신 뭘 떠올리든 마음으로 느끼는 게 상책이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23일 개막한 ‘네 번 접은 풍경’은 이 같은 최신작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5년 만에 열린 이번 개인전은 신작과 초기작을 함께 선보인다. 초기작이 검은 선으로 그린 도상의 형태가 한층 뚜렷이 눈에 들어온다면 신작은 날렵한 선으로 빚어낸 도상의 중첩과 어울림이 두드러진다. 독특한 건 그 배치다. 기존 건물인 갤러리 본관에 최신작, 이번에 새로 개관한 뒤편 신관에 초기작을 주로 걸었다. 양쪽을 오가려면 서울에 이런 곳이 있나 싶은 삼청동의 근사한 전경이 눈에 들어오는 동선이다. “A와 B의 비트윈(between), 사이의 공간이 재미있어요. 저쪽에 가면 여기서 본 게 잊어지고, 이쪽에 오면 저기서 본 게 잊어진다고들 하네요. 사이를 걷는 동안 뭔가는 기억하고, 뭔가 잔상이 남고. 중첩된 이미지랄까.” 전시장에서 만난 그의 말이다.

‘사이’와 ‘중첩’은 회화와 디자인, 회화와 건축의 사잇길을 걷는 듯한 그의 세계에 다가가는 데 요긴하다. 그는 건축의 도면부터 살펴가며 공간을 궁리해 설치하는 초대형 그림, 일명 ‘설치적 회화’로도 유명하다. 경기도미술관, 도쿄 한국대사관, 폴란드 포즈난 신공항 등이 그 현장이다. 포즈난 신공항은 ‘도서관, 미술관, 공항’ 가운데 고른 곳이다. “익명성,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는 지점이 중요하다고 봤죠.” 어쩌면 전시장에 걸린 그의 그림과 만나는 것도 그렇다. 복잡한 미술 사조와 이론을 굳이 몰라도 좋다.

“앞서 가는 것이라 생각했던, 아니 오해했던 이론이 3, 4년이면 뒤쳐진 게 되는 곳이에요.” 30년 넘게 살아온 뉴욕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뉴욕으로 향한 건 1981년, 홍대 미대를 나와 한창 촉망받던 28세 때였다. 헌데 국내에서 세계적 흐름이라 여겼던 것과 뉴욕은 딴판이었다. “신처럼 믿어왔던 게 산산이 깨지는 듯 했죠.” 이후 10년쯤 처절한 모색의 나날을 보내고서야 기하학적 도상, 건축적 회화에 이르는 자신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주로 90년대부터가 ‘초기작’인 배경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현대미술에서는 진부한 구닥다리”라고 여겼던 회화에 새로운 에너지를 부여하는 주역이 됐다.

이번 전시에 선보인 신작 ‘네 번 접은 풍경 L 139’. [사진 PKM갤러리]

이번 전시에 선보인 신작 ‘네 번 접은 풍경 L 139’. [사진 PKM갤러리]

전시장에 함께 걸린 신작과 초기작은 그에게 ‘발전’의 궤적은 아니다. “‘다시보기’인 거죠. 오늘 못 본 그림을 내일 와서 보듯. 언제부턴가 시간을 수직적으로 생각하는 게 재미없어졌어요. 저는 시간을 수평적으로 봐요.” 스스로의 말을 빌면 “거대담론의 세대, 뭐가 되어야 한다는 영웅주의 세대”였던 그는 얼마나 치열한 내적 투쟁을 거쳤길래 이런 인식의 전환에 이른걸까. 하지만 구체적 에피소드는 말을 아꼈다. 90년대 중반, 16년 만의 귀국전을 성공리에 열었을 때 문화계 후배가 했다는 조언이 그래서 아쉽다. “소설가 성석제가 그러더라구요. 인터뷰할 적에 고생했던 얘기 하지 말라고, 재미없다고. 누군 고생 안 했나요.”

좀체 격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의 화법은 감정이 절제된 작품과 통한다. 놀라운 건 마치 디지털프린트처럼 매끈한 이 그림들이 아날로그 수작업의 산물이란 점이다. 도상을 그리고 켜켜이 물감을 칠할 때마다 수십 차례 사포질 등으로 연마한다. 이런 작업을 주말은 쉬고 매일 8시간 규칙적으로 이어간다. 끼니도, 밤잠도 잊던 그가 “쉬는 것도 일”이란 걸 깨달은 건 지금의 작품세계가 시작된 시기와 맞물린다. “사랑도, 삶도, 에너지도 리밋(limit, 한계)이 있구나 싶었죠.”

유목민을 자처하는 그는 “한 작업이 어느 정도 됨직하다고 생각하면 또 할 작업이 많다”고 했다. 작품세계의 변화를 암시하는 걸까. “백남준 선생이 존 케이지한테 지금까지 만든 작품을 다 태워버리면 어떠냐고 하니까 케이지가 그랬어요. 그건 드라마틱해서 싫다고. 극적인 거, 극단적인 거는 별로 재미없어요.” 4월4일까지.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전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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