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단 떠나는 '지란지교의 시인' 유안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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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지란지교(芝蘭之交.벗 사이에 고상한 사귐을 가지라는 뜻)를 꿈꾸며'에서).

수필가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유안진(65.여) 서울대 교수가 강단을 떠난다. 유 교수는 지난 25년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에서 발달심리학을 가르쳐 온 아동학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최근 정년을 1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유 교수는 올해 만 65세로 정년까지는 아직 1년이 남은 셈이다.

"가르치는 것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는 그를 31일 서울대 호암교수회관에서 만났다. 그는 "득이 되는 공부"만 하는 요즘 학생들의 세태에 걱정이 많았다. 그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인생의 목표를 설정해야 할 대학생활이 '취직에 도움되는 수업' '쉬운 수업'만 찾는 학생들에 의해 변질되고 있다"며 "교양과목은 학생들이 집중을 안 해 거의 가르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문학의 위기도 지적했다. 그는 "옛날 같으면 7~8살 난 어린이도 줄줄 꿰던 천자문을 이젠 대학생도 모르고 있다"며 "서구화되면서 고전 공부를 점점 안 하는데 아무도 이런 상황을 문제 삼지 않는다"고 개탄했다.

미국에서 우리 전통 태교.육아문화에 심취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유 교수는 "정작 요즘 우리 학생들은 서양 이론만 추종한다"며 "가르치는 입장에서 정말 김빠지는 일"이라고 했다.

학생들에 대한 아쉬움은 보다 근본적인 얘기로 이어졌다. "교수로 임용된 1980년대 초반만 해도 학생들에게 삶과 사회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후부터 학생들의 진지함이 점점 사라지고 잡담만 늘어났다"고 전했다.

대학사회에 대한 쓴소리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교수가 논문의 질보다는 양으로 평가받고, 연구비를 많이 따오는 교수가 우대받는 곳이 오늘의 우리 대학"이라며 "그나마 연구비 지원도 시의성 있는 연구에 집중되기 때문에 순수 인문학자는 설 곳이 없다"고 비판했다. 이쯤에서 그에게 반론을 제기해 봤다.

-신세대 학생들의 변화 추세에 교수들이 못 따라간다는 지적도 있는데.

"동료 교수들과 '인문학이나 기초 교양과목의 수업 분위기가 산만한 것은 우리가 못 가르쳐서 그런 게 아니냐'는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우리 고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대학생들이 대학을 사회 진출을 위한 도구로만 여기는 것 같다."

-역동적이고 자기 주장이 강한 신세대 학생들이 수업 때 소극적이라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는데.

"요즘 학생들이 자기 주장이 강할지 몰라도 교양과목 수업에선 다르다. 자기 주장이 강한 것은 개인적인 것,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 등에 국한된 것이고 사회적이고 거시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의와 목표를 보고 살았던 과거와 대비된다."

유 교수의 퇴임식은 2월 말에 있다. 그는 "6년 전부터 그만두고 싶었는데 정부 지원 사업 때문에 계속 남았다"며 "지금까지는 수업을 목적으로 책을 읽었지만 앞으론 사심 없이 이 책 저 책 보면서 쉴 생각"이라고 말했다. 작품 활동도 계속할 생각이라고 했다.

한편 '나.너.그' 등 문법적 인칭을 넘나들며 자의식을 파헤치는 독특한 글쓰기 방식으로 문학계에 널리 알려진 서울대 불문과 이인성(53) 교수도 이번에 명퇴 신청을 했다.

박성우 기자

유안진 교수는 …

40여 년 동안 시.수필.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두루 썼다. 이들 작품을 통해 여성 정체성과 세속에서 구원의 길을 탐구해 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 중반 이향아.신달자 시인과 함께 펴낸 수필집 '지란지교를 꿈꾸며'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시집 '봄비 한 주머니'로 2000년 월탄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지난해 열두 번째 시집 '다보탑을 줍다'를 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65년 박목월 시인의 추천으로 월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서울대(교육학)와 미 플로리다주립대(교육심리학 박사)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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