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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누가 '갓뚜기'를 만들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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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 현 사회 2부 기자

이 현 사회 2부 기자

바다 건너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 가방에 한국 라면과 과자 등을 이것저것 챙겨 담았다. 짐을 풀며 챙겨온 컵라면을 꺼내는데, 라면 이름을 보더니 친구가 “우리 남편은 이제 이거 안 먹고 오뚜기만 먹겠대”란다. 곱씹어 보니 엊그제 술자리에서도 누군가 “오뚜기가 비정규직 안 쓰는 착한 기업”이라며 비슷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라면값이 오를 때마다 매출 1위 업체를 비난하며 불매운동을 벌이자는 이야기는 습관처럼 나왔지만, 그렇다고 삼양도 팔도도 아닌 오뚜기를 사 먹어야 한다는 주장은 생경해 SNS를 뒤져봤다.

불씨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농심의 법률 고문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이었다. 국정 농단 사태의 주역인 김 전 실장과의 연결고리는 소비자들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여기에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동생이니 농심도 사실상 친일 기업”이라는 논리, 라면 가격을 평균 5.5% 인상하겠다는 발표가 더해져 라면 업계 1위 농심에 대한 불매운동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반대급부로 경쟁업체인 오뚜기는 ‘갓뚜기’가 됐다. 오뚜기가 2015년 말 대형마트 등의 식품 판매대에서 일하는 시식 판촉 사원 1800여 명을 전원 정규직 채용했다는 뉴스에, 대다수 식품 업체는 인력 업체를 통해 단기 교육만 받은 직원을 파견받아 쓴다는 부연이 더해지며 미담은 눈덩이처럼 굴렀다. 함영준 회장이 고인이 된 부친 함태호 명예회장의 오뚜기 지분 46만여 주를 물려받으며 1000억원이 넘는 상속세를 5년에 걸쳐 전부 내기로 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준법행위까지 더해 ‘갓뚜기’ 스토리가 완성됐다. 그런 연유로 요즘 사회에 관심이 많은 20, 30대들 중 상당수는 “농심 대신 갓뚜기를 사 먹자”고 말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시식 사원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것은 식품업계의 보편적인 관행이다. 소비자와 얼굴을 맞대는 시식 사원의 역량에 따라 매출이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이다. 라면 경쟁 업체인 농심도 시식 판촉 사원은 전부 정규직을 쓴다. 전자공시에서 조회해 보면 동원F&B·삼양식품 등도 전 직원을 통틀어 기간제 근로자는 4% 남짓이다.

어느 기업이 착한 기업이다, 어느 기업이 억울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취향 때문이든 신념 때문이든 어느 제품을 살지 선택은 소비자의 몫이다. 다만 그저 내 신념에 부합하는 이야기라서 혹은 눈에 익은 선악 구도를 더 분명히 하는 이야기라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쉽게 믿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걱정이다. 나라가 발칵 뒤집혀도 이 모든 것이 조작이라고 믿고 싶은, 그래서 그렇게 왜곡해 믿어 버린 사람들을 닮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말자는 이야기다.

이 현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