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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통상문제 전담할 독립기구 ‘한국판 USTR’ 만들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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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보호무역 파고에 대비하자

USTR엔 통상 전문가 200명 넘어 #20년차 베테랑 포진, 교섭력 뛰어나 #미·중 보호무역 장벽 높아지는데 #한국 순환보직, 전문성 쌓기 힘들어 #장관급 승격시키고 인재 충원해야

수년 전 해외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최 통상 관련 회의. 각국에서 날아온 참석자들은 서로 가족 안부까지 물으며 살갑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공무원 신분의 한국 대표는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한 채 겉돌아야 했다. 다른 나라 대표들은 보통 5~6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통상 분야에서 일하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반면 한국 대표는 순환보직 원칙에 따라 이쪽 업무를 맡은 지 1~2년밖에 안 되는 신출내기였다. 자연히 누가 누구인지는 물론 통상업계의 핵심 이슈에도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통상 관련 국제무대에서 늘 벌어지는 낯익은 풍경이다.

‘미국 우선주의 ’를 앞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에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갈등에 따른 중국의 무역 제재 등으로 어느 때보다 한국을 향한 보호무역주의의 파도가 거칠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중심을 잡고 능수능란하게 대처해야 할 컨트롤타워가 절실하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하지만 지금 우리 정부의 통상 부문은 어느 때보다 쪼그라든 상태다.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들은 차기 정부의 최대 통상 과제로 ‘한국판 미국무역대표부(USTR)’ 설치를 한목소리로 제안했다.

1962년 특별법에 의해 설립된 USTR은 통상 교섭은 물론 대내외 투자 등을 총괄하는 대통령 직속 기구다. 최대 강점은 200명 이상의 전문가가 입사 이후 줄곧 통상 관련 업무만 담당한다. 10~20년 이상의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들이 즐비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수십 년째 특정 국가와의 무역 분쟁이나 다자 기구에서의 현안 등을 다루게 되면 자연스레 뭐가 핵심 이슈인지 훤히 꿰뚫게 된다. 미국이 어느 나라보다 통상 교섭 능력이 뛰어난 것도 이 같은 시스템 덕이 크다.

USTR을 이끄는 수장이 대통령 주재 각료회의의 장관급 고정 멤버라는 점도 조직의 위상을 말해준다. 아울러 장관급 기관장이 버티는 덕에 다른 정부기관과의 협업도 훨씬 수월하다. 실제로 USTR은 19개 관련 기관으로 이뤄진 무역정책심의그룹(TPRG)을 총괄·지휘한다.

USTR과 같은 통상 전문 독립기구 설치는 세계적 추세다. 영국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결정된 직후인 지난해 6월 ‘국제무역부’를 장관급 독립 부처로 신설했다. 일본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의 성공적 출범을 위해 만들어 놨던 대책본부를 통상 전반을 총괄하는 새로운 조직으로 개편할 예정이다.

영국도 통상 독립기구 신설, 세계적 추세

이에 비해 한국의 통상 관련 기구는 직원들의 전문성은 물론 정부 내 위상도 크게 떨어진다. 전담 조직이 산업통상자원부의 3개 담당 업무 중 하나로 돼 있다는 점부터 옹색하다. USTR이 장관급이 이끄는 데 반해 한국의 통상 조직은 차관보가 책임자로 돼 있다. 다른 부처와의 원활한 공조가 쉬울 리 없다. 또 다른 결정적 약점은 순환보직 원칙으로 직원들의 이동이 잦다는 점이다. 현재 일반직의 경우 과장급 이상은 2년, 사무관은 3년 근무 후 타 부서로 옮기게 돼 있다. 그나마 전문직으로 들어와도 국장급은 2년씩 두 번에 걸쳐 4년, 과장급은 3년씩 6년까지밖에 통상 분야에서 일할 수 없는 형편이다. 전문성이 쌓일 리 없다. 게다가 통상 업무는 부처 내의 핵심 주류라는 인식이 희박해 직원들이 장기간 근무를 기피한다. 장차관까지 오르려면 통상이 아닌 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게 유리하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이 같은 단점을 극복하려면 통상 업무만을 전담하는 한국판 USTR을 신설한 후 이를 장관급 기관으로 승격시키는 게 지름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리셋 코리아 통상분과 위원들은 “권한과 기능이 강화된 책임 부서가 영속성을 갖고 통상 문제를 다뤄야 한다”며 “결론적으로 USTR과 같은 기구가 꼭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조직이 생기면 “20년 이상 이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이 생겨 협상력이 높아진다”는 게 대표적 장점으로 꼽혔다. “이런저런 협상과 국제회의 등을 통해 같은 분야의 외국 전문가들과 교류하게 되면 서로 양보하고 필요한 사안은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좋은 인력이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를 위해서는 “전담 직원을 두는 것보다 아웃소싱하면 좋을 업무는 과감하게 밖으로 업무를 넘겨야 한다”고 위원들은 제안했다.

시민마이크 응답도 “통상 독립기구 찬성”

한편 ‘통상 전담 독립기구를 만드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대해 네티즌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중앙일보·JTBC의 여론 수렴 사이트 ‘시민마이크’에 글을 올린 시민의 3분의 2가 “통상 전담 조직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30% 정도만이 “옥상옥이 되지 않겠느냐” “기존의 조직을 쇄신하는 게 낫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새로운 기구를 출범시키면 추가 예산이 드는 데다 요즘 세상의 대세로 자리 잡은 ‘작은 정부’ 원칙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다수 시민이 통상 전문 기구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는 얘기다. 다만 명심할 부분은 “필요하다”고 답한 이들 중 대부분이 “반드시 능력 있는 전문가로 구성돼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는 대목이다. 통상 전담 기구를 만들더라도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인재들로 채우라는 요구인 셈이다.

통상분과에서 시민마이크를 통해 여론을 수집하기 전에는 “응답자가 너무 적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다. 통상 분야는 교육·고용 등 생활 밀착형 분야에 비해 보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영역이라 관심 이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초 기대보다 훨씬 많은 응답자가 구체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미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압력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또는 폐기가 점쳐지는 상황이라 시민들의 관심도 결코 적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남정호 논설위원 namj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