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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조원 하만 인수 성공했지만… 이재용 없는 삼성, 과제 산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Keep calm and carry on(평정심을 유지하고 하던 일을 계속 하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정부가 국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든 포스터 속 문구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 사태를 맞은 삼성 그룹에 딱 맞는 경구”라고 조언했다. 인사나 조직개편, 미래 먹거리 확보 작업 등에 차질은 불가피하겠지만 눈앞의 경영 현안을 흔들림없이 챙겨 매출 329조(2015년 상장 15개사 기준)의 거대 그룹이 흔들리지 해야 한다는 얘기다.

갤럭시S8과 AI플랫폼 '빅스비' 곧 공개 #AI 시장서 어떤 평가 받을지 시장 관심 #구조조정과 미래 먹거리 확보는 정지 #"글로벌 스탠다드 정립 계기로" 조언도 #

 일단 하던 일은 순조롭다. 17일(현지시간) 미국 전장업체 하만은 주총을 열고 삼성전자와의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80억 달러(약 9조2000억원)의 인수합병이 성사된 것이다. 미래 먹거리로 스마트카 부품 사업을 키우려던 삼성전자의 핵심 승부수가 먹힌 셈이다. 남은 절차는 미국ㆍ중국ㆍ한국ㆍ유럽연합(EU) 등 핵심 시장에서 규제 기관의 승인 뿐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늦어도 3분기까지 인수 작업은 마무리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하만 인수로 삼성전자는 단숨에 BMWㆍ피아트크라이슬러ㆍ현대차 등 세계 주요 자동차 업체를 고객으로 확보하게 됐다.

전문경영인 중심의 시스템 경영이 정착한 삼성에서 이 부회장 구속으로 당장 경영 공백이 생기진 않을 거란 게 시장의 전망이다. 17일 삼성전자 주식이 0.42% 빠진 데 그친 것도 ‘삼성 시스템의 힘’ 덕분이란 분석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결정을 해야하는 현안은 줄줄이다.

 삼성전자가 상반기 앞두고 있는 가장 큰 현안은 ITㆍ모바일(IM) 부문의 핵심 제품인 갤럭시S8 공개다. 지난해 갤럭시노트7 단종 사태 이후 출시되는 첫 전략 스마트폰인만큼 시장의 관심이 한껏 쏠려있다. 시장이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갤럭시S8 자체의 성능보다 S8에 탑재될 인공지능(AI) 플랫폼 ‘빅스비’다. 스마트폰 시장은 포화된 데다 중국 업체의 추격으로 삼성전자의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막 열리기 시작하는 AI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어떤 위상을 차지하느냐가 주목받는 이유다. 빅스비는 지난해 인공지능 기술 스타트업 ‘비브랩스’를 인수한 삼성이 야심차게 내놓는 AI 오픈 플랫폼이다.

이경목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빅스비의 음성 인식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구글 어시스턴트나 아마존 알렉사와 비교해 어떤 성능을 보이는지가 삼성전자의 미래 성장을 가늠할 잣대가 될 것”이라며 “AI 와 사물인터넷(IoT) 시장은 선두 주자가 뚜렷이 정해지지 않은 초기 단계여서 주도권 싸움이 치열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외에 중국의 추격에 맞서 반도체 사업의 격차를 유지하는 것, 미국 등 프리미엄 시장에서 확보한 가전 사업의 우위를 지켜나가는 것 등이 삼성전자의 현안이다. 미래 성장동력으로 키우고 있는 전장 사업이나 바이오 사업 등은 눈앞의 이익보다 수십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고 천문학적 투자를 지속해나가야 한다.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년여 간 추진해 온 계열사 구조조정 작업도 아직 마무리가 되지 않았다.
송재용 서울대 경영대 교수는 “비주력ㆍ비핵심 계열사를 정리하는 작업이야말로 전문 경영인이 지휘할 수 없는 영역”이라며 “글로벌 IT 산업 지형이 격변하는 시점에 미래 성장동력 확보 작업이 멈추게 된 것이 가장 우려되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삼성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시스템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특히 미래전략실을 중심으로 한 가신 그룹이 ‘시스템을 넘어선 정무적 판단’으로 이번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주류다. 이런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지적되는 ‘편법 승계’ 논란을 어떻게 끊어내느냐도 숙제다.
조명현 교수는 “한국의 정치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업에만 ‘정경 유착을 근절하라’고 주문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면서도 “삼성이 어떻게 하면 글로벌 기준에 부합하는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을지, 그동안 지나치게 정치권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었는지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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