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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균형의 왕 #13

중앙일보

입력

<별것 아닐 땐 난리를 치면서도>

계절이 바뀌면 듣는 음악도 바뀌기 마련이다. 내가 버락 오바마는 아니지만 나도 가끔 SNS에 플레이리스트를 공개한다. 1명이라도 관심 가져주는 사람이 있겠지. 제발 좋아요 좀 눌러줘.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너도 좋아한다고. 최근 몇 년간 여름에 많이 들었던 노래가 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노래를 오만한 얼굴로 내놓고 싶지만 제목에서부터 이미 글러 먹었다. 바로 토이의 ‘여름날’이다. 유희열이 음악을 만들고 페퍼톤스의 신재평이 노래를 불렀다. 실은 지금도 이 노래를 이어폰에 꽂고 글을 쓰고 있다.

일단 이 노래는 노래 자체로도 훌륭하다. 식상하기 짝이 없는 표현이지만 이런 노래를 가리켜 ‘웰메이드’라고 한다.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든 기타 팝이다. 유희열과 신재평의 조합이 기대만큼의, 아니 기대 이상의 결과물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내가 이 노래를 듣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이 노래에는 슬픈 사연이 있어...는 아니고, 이 노래에는 모티브가 있다. ‘여름날’은 만화 <H2>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H2>는 고교 야구만화를 가장한 청춘만화다. 몇 년 전에는 <응답하라 1994>가 이 작품을 표절, 아니 지나치게 참조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휘말리기도 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H2>를 비롯한 아다치 미츠루의 여러 작품에서 여러 가지를 지나치게 따왔다는 의혹에 휘말렸었다. 아다치 미츠루를 신으로 모시는 나에게는 썩 유쾌하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래서 난 ‘응4’를 안 봤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다. 미안하다. 사실 그냥 어쩌다 보니 안 봤다. 솔직한 나를 사랑한다.

‘여름’은 <H2>를 관통하는 핵심 테마였다. 그리고 ‘여름날’은 <H2>의 기운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마치 <H2>의 공식 사운드트랙 같다. 아다치 미츠루도 이 노래를 듣는다면 반할 것이다. “내일이 오면 괜찮아지겠지 잠에서 깨면 / 잊지 말아줘 어제의 서툰 우리를 / 너의 꿈은 아직도 어른이 되는 걸까” 알쏭달쏭하지만 알쏭달쏭하기 때문에 매혹적인 가사가 이 노래에는 가득하다. <H2>도 그랬다. 현실에서 하면 왠지 오그라들 것 같지만 그렇게 말해도 오그라들지 않는 현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명대사가 가득했다. 몇 개만 말해볼까.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재미를 가르쳐드리지요.”

“중2 때까지 코흘리개 꼬마였어. 겨우 키가 커서 슬슬 여자친구라도 하나 사귀어 볼까 싶었을 땐, 괜찮은 애는 모두 첫사랑 진행 중이었지.”

“기다리는 시간도 데이트의 일부잖아.”

“엉큼한 게 뭐가 나빠.”

마지막 대사는 없던 걸로 하자.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딱 하나 꼽으라면 이것이다.

“히로는 별것 아닐 땐 난리를 치면서도 진짜 아플 땐 아무에게도 말 안 해.”

이 만화의 여주인공 히카리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이 만화의 남주인공 히로에 대해 하는 말이다. 옆에서 듣고 있는 사람은 히로를 좋아하는 이 만화의 또 다른 여주인공 하루카.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 대사는 이 만화의 핵심을 가로지르고 있다거나 많은 사람이 꼽는 명대사는 아니다. 아닐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어떤 대사보다 깊게 남았다. 왜냐하면 저 대사에서 ‘히로’를 ‘봉현이’로 바꾸어도 완벽하게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봉현이가 히로처럼 멋있다거나 귀엽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도 가끔은 날 3인칭으로 부르고 싶은 날이 있다. 이해해줄 것이라 믿고 내친김에 더 달린다.

“봉현이는 별것 아닐 땐 난리를 치면서도 진짜 아플 땐 아무에게도 말 안 해.”

이 대사에 담긴 묘한 균형감이 맘에 든다. 작년에도 맘에 들었는데 올해에도 여전히 맘에 든다. 언젠가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난 짧은 참을성은 별로 없지만 긴 인내심은 강한 것 같아.”

“맞아요. 정말 맞는 것 같아요.”

“고마워. 햄버거 사줄게.”

‘짧은 참을성은 별로 없지만 긴 인내심은 강한 것 같아.’와 ‘별것 아닐 땐 난리를 치면서도 진짜 아플 땐 아무에게도 말 안 해.’가 서로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서로 통하는 말임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를 가슴에 지녀온 내가 후자를 읽고 기억에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난 줄을 서야 하는 음식점에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기다리기 싫다. 더 적절한 예가 있다. 난 플레이스테이션4 게임 시디를 살 때 온라인 주문보다는 직접 매장에 가는 편이다. 지출로 따지자면 온라인 주문은 무료배송이거나 택배비 3천 원 정도가 들고, 직접 매장에 가서 사면 왕복 택시비 2만 원 정도(와 시간이) 든다. 즉 온라인 주문을 하면 돈을 1만 원 이상 아낄 수 있(고 시간도 아낄 수 있)다. 하지만 내 선택은 번번이 매장 방문이다. 택배가 오는 하루나 이틀을 기다리기 싫어서다. 아 몰라. 빨리빨리. 언제 기다려.

하지만 내가 매사를 이런 자세로 대하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내가 지금껏 글을 쓰고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적어도 지금까지는 꽤 괜찮게 해온 것이 있다. 바로 ‘좋아하는 것을 파고드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를 오래 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성실함이나 꾸준함 같은 덕목을 늘 재능의 별책부록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재능만큼 중요한 것은 ‘인내’다. 내가 보기에 그 둘은 정확히 50 대 50 이다. 이것을 3단계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다.

아이디어를 내는 것 < 넘사벽 < 실제로 (한번) 하는 것 < 넘사벽 < 인내하면서 계속하는 것

이렇게 보면 나는 참을성이 매우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좋을 때는 당연히 즐기지만 나쁠 때도 그러려니 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십수 년이나 한결같이 해오고 있으니까. 버티는 삶의 황제, 김봉현으로 불러주세요.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요.

짧은 참을성은 별로 없지만 긴 인내심은 강한 나는, 히로처럼 별것 아닐 땐 난리를 치면서도 진짜 아플 땐 아무에게도 말을 안 하기도 한다. 실제로 난 알량한 마음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썸을 타던 여성과 잘 되지 않았을 때는 동네방네 소문을 내며 위로받으려 애쓰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경우와는 마음의 카테고리가 완전히 다른, 그러니까 균형의 왕인 내가 내 삶의 균형이 깨지고 밑바닥이 붕괴되더라도 괜찮다는 놀라운 결심으로 잘해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하던 사람과 어긋났을 때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 무게를 나 혼자 온전히 짊어졌다. 마치 무인도에 혼자 사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화하고 싶다. 멋있게 포장하고 싶다. 내가 이렇게 생각이 깊고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잖아? 난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사람이야. 내 아픔은 내가 감당하는 게 진짜 어른의 모습 아니겠어? 괜히 남까지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뭐, 가벼운 거야 남들과 나눌 수도 있지만 사람들을 진짜로 힘들게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구.

하지만 아닌 것 같다. 양보해서 절반쯤은 그렇다 하더라도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나머지 절반은, 실은, 두려움인 것 같다. 나는 남들에게 보여도 내가 무너지지 않는 가벼운 아픔은 얼마든지 보이면서도, 남들에게 보이면 내가 다 까발려지는 진짜 아픔은 보이기 두려워하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히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삶의 과제 하나가 선명해진 기분이다. 언제쯤 나는 나를 다 드러내도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될까. 어떻게 하면 나는 나 자신을 믿는 만큼이나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있게 될까. 하지만 낙담하거나 비관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시간문제다.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 아니 타임아웃이 없는 인생의 재미를 가르쳐드리지요.


작가 소개    
대중음악 평론가, 혹은 힙합 저널리스트.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네이버뮤직>, <카카오뮤직>, <에스콰이어>, <씨네21> 등에 연재 중.
레진코믹스 힙합 웹툰 <블랙아웃> 연재 중.
<서울힙합영화제> 기획 및 주최.
<건축학개론>을 극장에서 두 번 봤고 두 번 다 울었음.

주요 저서 및 역서
『한국 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우리 시대의 클래식』,
『힙합-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나를 찾아가는 힙합 수업』
『제이 지 스토리』,
『더 에미넴 북』,
『더 스트리트 북』,
『더 랩: 힙합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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