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의 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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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우리나라의 정치는 여전히 군중에 집착해 있다. 아무개의 연설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느냐를 놓고 성패의 스코어로 계산한다.
요즘 어느 정치인의 지방나들이에서도 그것이 시비가 되었다.
똑같은 집회장을 보고도 도하신문들은「수많은 군중」이라는 표제에서부터「수십만」,「30만」,「50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으로 보도했다. 당사자는 외국의 한 지방신문보도를 인용해「1백만」이라는 주장도 했다.
우선 그 시각의 차이가 놀랍다. 수천명도 아니고 무려 수십만명의 차이가 난다.
이런 시비는 미국에서도 때때로 본다. 70년대 반전데모가 한창일때 거기에 참여한 군중의 수가 제각각이었다. 그 무렵 어느 사회학 교수가 항공촬영 사진을 놓고 분석해본 결과는 세상에 알려진 숫자의 절반에 불과했다.
그 교수는 부양인원을 4.5명으로 계산했었다. 당의 넓이는 분명하고, 항공사진은 군중의 밀집도를 한눈에 보여주었다.
그러나「한 평의 땅위에 평균 몇명」이라는 수식도 한계는 있다.
집회의 열기, 남녀의 구성분포, 기온, 집회의 종류, 확성기의 성능, 군중의 연령층에 따라 군중의 밀집도도 달라진다. 여성이 섞여있으면 아무래도 사람들은 바싹바싹 붙어 앉는다는 심리분석도 있다.
이처럼 군중의 수를 시비하는 미국에서도 정치인들은 군중지향의 정치엔 별 훙미를 갖고 있지 않다.「레이건」의 집회가「카터」의 집회보다 군중이 더 많이 모였다거나 적게 모였다는 것이 화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역시 군중보다 국민을 상대로한 정치를 한다. 정작 국민들은「레이건」의 집회에도 가고,「카터」의 집회에도 간다. TV토론은 똑같이 나란히 등장하기 때문에 공정한 평가가 가능하다.
정치가 그만큼 무르익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런 정치풍토에선 군중을 버스로 모셔올 필요도 없고, 박수를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나라 정치도 이젠 광장의 군중을 상대로 하기 보다 각자 자기자리에 진중하게 서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펼쳐져야 할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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