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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차실장·김부장 맞바꿈건의하려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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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궁정동의 비극속에서 살아남은 단 한사람인 당시의 김계원대통령 비서실장이 8년의 침묵을 깨고 그날을 증언했다. 박대통령·차지철경호실장·김재규정보부장이 사라진 오늘 그는 한국 역사상 가장 숨 가빴던 운명의 79년10월26일 밤을 지켜본 단 한사람이다. 그는 지금 형 집행정지 자로 52년이래 살아온 서울원효로 자택에 칩거하고 있다.
육군참모총장·중앙정보부장·주중대사·대통령비서실장 등 한 때의 영예는 그 밤의 비극과 함께 묻어버려야 했던 그 이기에 그 밤은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멍에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그밤의 비극을 부른 권력의 질주를 말하면서도 마음의 평온을 잃지 않았다.
『10· 26 당일 나는 국가 존페의 위기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 탓일까.
『모시던 분이 비명에 갔는데도 구차하게 살아 남아 삶을 영위하는게 더할 나위 없는 아픔이며 치욕입니다. 그러나 내란에 휘말릴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서 내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모든 조치를 취했다는 사실만은 지금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조치를 했어야 하고 그게 가능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것은 당시의 권력구조나 실제 형편을 모르는 시비일 뿐입니다』라고 그는 단언했다.
『육여사는 박대통령에겐 반려자이자 유일한 견제자이기도 했는데….』
여러 사람들의 한결같은 말 그대로 김계원씨도 박대통령은 육여사가 돌아가신 후 공허감에 사로잡혔고 그것이 대통령의 분별력을 잃게 했다는 아쉬움으로 말문을 열었다.

<서거 뒷처리 최선다해>
『육여사가 돌아가신 후 가족들의 공허감 속에 최태민이란 자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김재규부장은 최의 금전횡령·불륜행위 등 숱한 비행을 조사해 대통령께 보고하고 그의 청와대 출입을 못하도록 진언했지요. 대통령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이 일로 김부장은 대통령 가족의 미움을 샀습니다. 대통령이 김부장 보다 차실장쪽에 더 기울어 간데는 여기에도 원인이 있겠지요….
어쨌든 대통령께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기에 재혼을 권유했습니다. 계속 권유하니까 대통령은<쟤 (근혜양)가 시집가면 나도 재혼하지>라고 했어요.』육여사가 가신 뒤 차지철이 경호실장으로 기용된 것도 운명적이다. 비어있는 부인의 자리에 끼어 든 것이 어쩌면 차지철이었던것 같다고 김씨는 말했다.
차는 그림자처렴 따르면서 마음의 빈자리를 메워준게 아니라 대통령을 혼자 감싸고 돌며 그에게 고분고분한 사람 이외의 접근을 막았다. 대통령에게 증언이나 조언을 해오던 사람들을 특히 철저하게 막았다. 심지어 세상 여론을 곧잘 전하는 대통령의 동서 조씨 조차 대통령을 만나기가 어렵게 됐다.
김재규정보부장까지도 차경호실장을 통해야만 대통령을 만날수 있는 그런 형편이었다.
『자유중국 대사를 하고 있던 중 지역구 출마를 권유받고 78년11월에 귀국했습니다. 나는 국회의원 공천을 주나 보다 했는데 대통령비서실장을 하라는 거예요. 김부장이 제일 좋아합디다…. 헌데 이상한 것은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막바로 만나지 못하고 경호실장을 거쳐야 하는 거예요. 내가 대사로 나가기전 정보부장을 할 때는 없던 일이거든요. 정보부장 만큼은 무상으로 출입하며 대통령과 단독으로 만나곤 했어요. 그래 김부장에게<야 언제부터 그랬니>했더니 한 2년 됐다고 합디다. 그 뒤로 김부장은 전화를 걸고 내방으로 와서는 내가 부른 것처럼 해 가지고 대통령 집무실로 갔습니다.
비서실장의 교체는 경호실에 밀리기만 하던 김부장에게 만회의 기회로 보였다. 그러나 기대는 반대쪽으로 빗나갔다. 차실장 보다 5년이나 먼저 대통령 곁을 지킨 김정렴비서실장은 차에게는 상당한 견제역을 했다. 그러다가 78년12월에 비서실장이 바뀌고 신임비서실장이 청와대의 분위기를 익히고 있는 사이 그는 비서실의 영역까지 어느새 들어와 버렸다.
실제로 신임 김실장 취임 직후가 되는 79년 들어 대통령은 더욱 차실장에 기울어갔다. 한 예를들자. 대통령은 오전9시30분 집무실로 내려온다. 비서실장은 그보다 l시간전인 8시30분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보고 사항을 정리하는 등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대통령이 집무실에 도착하면 맨 먼저 들어가 만난다.
이때 비서실장은 각 정보기관에서 올리는 밀봉된 보고서도 가져간다. 대통령은 밀봉된 보고서를 열어 읽고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뒤 그날의 국정방향을 정해 하루를 시작한다.
그런데 김계원실장 취임후 비서실장의 아침 정례보고가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밀리는 경우가 잦아 졌다. 차실장이 비서실장 보다 먼저 들어가 정보보고를 하기 때문에 비서실장이 기다리기 일쑤였다.
이것은 파워 게임에서 중대한 변화였다. 바쁜 일정에 쫓기는 대통령은 일단 먼저 받은 보고에 따른 선입관을 갖게되어 그 뒤의 보고에 대해선 흘려 듣기 일쑤였다.
그 무렵 차실장은 새로 정보기구를 두고 정보수집과 공작활동을 하게 해 김재규부장을 견제했다. 박대통령은 드물지만 김부장이 올린 보고서를 차실장에게 돌려 그 정확성을 조사 보고 하도록 했다.

<김부장 보고 차가 확인>
차실장은 국회와 여야당에도 요원을 보내고 있었으며 의원들까지 그에게 보고하도록 하는 채널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점차 더 대통령 가까이로 다가갔다. 대통령 직속기구의 균형이 깨지고 차실장의 힘이 커졌다.
청와대의 후기가 이랬었다는 지적에 대해 『차실장이 대통령의 눈과 귀를 차단했지만 비서실장이고 군의 대 선배인 내게만은 그래도 조금은 조심성을 보였다』면서 그러나 차실장의 위세가 국정전반을 조타했다는 사실은 시인했다.

<이미 어느 월간지에도 공개됐으니까…>라는 말로 그는 한 사례를 얘기했다.
『차가 경호실장으로 있을때 육군고위 지휘관이던 모씨는 1주일에 하루는 차실장 방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한심한 일이지요. 당시 군정보 책임자가 8기 출신인데 이런 그 지휘관을 아주 못마땅해 해서 반목했습니다. 군의 두 요직자가 다투게 되니 김재규부장이 차의 사람인 그 지휘관을 몰아 낼 찬스로 삼았습니다. 그는 인사문제 등으로 해 가뜩이나 평판이 나빴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만을 내보낼 수 없으니 두 사람 다 옷을 벗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때 국방장관은 육군참모총장 인사의 건을 차실장에게 먼저 상의를 했어요. 차실장은 국방장관이 후임 총장으로 천거할 사람 중 P장군을 밀었읍니다. 그리고는 그 한사람만을 대통령께 추천하라고 권했어요. 실제로는 강요했다고 해야겠지요. 그때 나는 대통령 집무실에 대통령과 함께 있었는데 국방장관이 들어왔어요. 무슨 일이냐니까 참모총장 인사의 건이라고 해요. 본래 비서실장은 인사문제 논의에는 참여 않는게 관례고 해서 집무실을 나오려는데 대통령이 <김실장 어디가. 그냥 앉아 있어>라고 하십디다. 장관이 P장군을 열심히 소개하더군요. 그런데 대통령께서는 탐탁치 않은 표정을 지으며 가만히 계시는거예요.그래 내가<여보 장관, 각하께 복수로 추천을 해서 선택하시도록 해야지 왜 그래요>라고 했더니 뒤에서 다른 서류봉투 하나를 주섬주섬 꺼냅디다. 복수 추천을 할 요량으로 둘을 가져왔다가 차실장의 말을 듣고 하나만 꺼내놓았던 것이지요. 대통령께서는 한번 훑어보시더니<이 사람 좋군>하시더군요. 그게 정승화장군입니다. 정장군은 정말 순수한 진짜 군인입니다. 인망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정장군을 선택한 것은 정체된 군 인사를 위서해 필요했어요.
3기인 노재현장군이 총장을 한 뒤 그보다 선배되는 2기의 이세호장군이 연임을 했기 때문에 상당히 정체가 됐었거든요. 이런 사정으로 후임 총장은 5기나 8기로 가야 한다는게 중론이었지요. 그런 점에서 3기인 P장군보다는 5기의 정장군이 적임이라 하겠지요. 정장군이 최근 무슨 월간지에 차실장이 <대통령께서 직접 정장군을 총장으로 지명했다>는 전화를 해왔다고 했던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자신이 천거한 사람이 안되긴 했지만 좋은 소식을 먼저 알려주어 생색을 내고 자기편으로 끌어들이자는 것이지요.』그는 독주하는 차실장을 견제하려고 애썼다고 했다. 『실제 대통령은 차실장을 무척 좋아했어요. 딱뿌러지게 움직이고 힘있게 일을 추진하니까요. 그런면에서 나는 대통령이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도 대통령은 나와 어울리기를 좋아했지요. 함께 어울려 술도 자주 마시고….』 10·26 저녁과 같은 술자리는 두 달에 한번, 그 밖에 매달 두 차례 정도의 공식주연도 있었지만 김실장과의 술자리는 자주 있었다고했다. 『김부장과 차실장은 항상 으르렁댔죠. 새까만 후배인 차실장이 자신을 호출해 올리고 자신의 업무인 정치 분야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고 나서니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 안되겠다 싶어 대통령께<정치문제는 김부장에게 맡기시죠> 했더니 <저 친구(차실장)가 국회의원도 지내고 해서 정치를 잘 안다>고 해요. 내버려 두라는 얘기죠. 그러니 둘 사이는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었죠. 두 사람 사이에 하도 소리가 나니까 대통령도 한때는 바꿀까 한적도 있었지만 그것으로 그만이었어요. 79년 가을 두 사람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내가 나서기로 했읍니다.

<참모총장 인사도 간여>
사실은 10월27일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 두 사람 모두 퇴진을 시키도록 건의할 계획이었습니다. 대통령이 반대하시면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꾸도록 해볼 참이었죠. 차실장이 정치를 잘 안다고 해서 정치 조정까지 하도록 했으니 직접 정보부장을 맡기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 월권 시비는 없어질테고…. 그런데 그게 하루 전 다 끝나버리고 말았으니….』
김실장은 자신의 이같은 시도가 불발로 그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박대통령·김부장·차실장 그리고 자신을 비롯, 정승화육군참모총장의 만남이 운명적이라고 했다.
10·26후 설치된 계엄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된 김실장에 대한 죄명은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죄였다. 이후 고등군법회의에서는 공소장의 변경으로 내란목적 살인죄가 단순살인죄가 됐으며 사형이 선고됐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의 확인조치 과정에서 무기로 감형됐다.
김실장은 자신에게 씌워진 이러한 죄상들에 대해 동의할 수 없다면서 절대복종의 룰에 살고 있는박흥주등에 대한 사형처분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했다.
『나에 대한 의문은 궁정동에서 대통렁을 기다릴 때 김부장이 차실장을 해치우겠다고 「범의」를 밝혔는데도 왜 가만이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그같은 결과가 났으니까 하는 말이지 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김부장은 차실장과 다투고 내방에 올 때면 그말을 입 버릇처럼 했어요. <저 친구 없애 버릴꺼야><해치울꺼야>라고 할 때마다 내가 조치를 취하고 문제 삼았다면 벌써 수 십 차례가 됐을 겁니다. 내가 군에 있을 때 한 장교가<저×× 죽여버릴까>라고 말한 적이 있었읍니다.
우리가 화났을 때 일상적으로 하는 감정의 표현이었죠.그런데 미고문관이 무슨 말이냐고 물어요. 통역관이라는 친구가 그대로 직역해 이라고 해서, 군재회부니 하는 소동이 났습니다. 차실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탱크」란 말도 그랬습니다. 그는 걸핏하면 <탱크로 깔아 버려> 어쩌고했읍니다만 정말로 그렇게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부마사태 당시의 그런 말도 실은 여당 사람들이 축처져 있으니 정신 차리라고 호통친 것 중의 하나죠. 이건 다른 말이지만 차실장이 실제 탱크를 좋아하기는 했어요. 탱크를 청와대 앞에 대기시켜 두곤했지요. 하루는 밤중에 대통령 둘이서 미행 한적이 있읍니다.
그때 탱크 몇대가 마침 들어오고 있었어요. 그래 대통렁에게 <대통령관저 주변에 탱크를 두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치우는게 좋겠읍니다>고 했더니 <무슨 탱크?>하고 전혀 모르는척 하셔요. 모를리가 없지요. 그리고는 이틀 뒤 탱크부대를 철수토록 지시하더군요. 차실장이 갖다 놓은 것을 내가 치우도록 건의한 사실이 알려지면 차실장과 내 사이가 안 좋을까 해서 그렇게 배려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또 파티석상에서 내가 김부장의 총격을 저지 못한 것을 문제삼는 것도그렇습니다.
내 친구들도 그러더군요. <그래 김부장의 손을 탁 쳐서 총을 뺏으면 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말은 쉽지만 그렇지 않아요. 나도 총격을 받고 쓰러지는 현장을 수백 번 보았지만 흥분해서 날뛰는 그 자리에 있으면 다릅니다. 사실 그 뒤 육본에 갈 때까지도 나는 그가 차실장과의 감정 때문에 홍분해서 일을 저지른 것으로알고 있었구요.』김부장의 행동을 전혀 예측 못 했노라고 회고하던 김실장은 궁정동의 순간들을 말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로서는 모시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죽지 못한게 한입니다. 수사관들은 김부장이 세 사람 중 나만 죽이지 않고 내버려둔게 사전모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하고 추궁합디다만 김부장과 나 사이를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김부장 생명의 은인>
내가 그의 생명을 살려준 적이 있으니까요. 김부장이 어디서 존경하는 사람으로 박대통령·이종찬장군·정구영씨(전공화당의장)·나 등을 꼽았다는데 나의 경우는 존경이 아니고 은인이라는 뜻에서 좋아한다는 것일 겝니다. 김부장과의 얘기를 더하면 이렇습니다. 4·19가 나자 육대총장이던 이종찬장군이 국방장관이 됐습니다. 이때 육군참모총장이던 송요예장군이 후임 육대총장에 송석하장군을 임명했습니다. 이장관께서 펄쩍 뛰시는 거예요.
내 후임이고 내가 국방장관인데 한마디 상의 없이 했다고 말입니다. 그러더니 육본정보국장이던 나를 육대총장으로 발렁했습니다. 그때 부총장이 김재규준장이었지요.
육대총장으로 있을 때 당시 통제부 사령관이던 이희정제독(소장) 이해군참모총장으로 발탁돼 이틀후면 서울로 올라가게 됐습니다. 이제독이 나와 김재규준장을 이웃해있는 마산 술집으로 초대했읍니다.
중장으로 승진, 영전돼가는 그는 거나하게 취했으면서도 자신이 운전을 하겠다고 고집하며 운전병을 내리게했습니다. 자기 차에는 김준장을 태우고 이제독이 운전하는 차를 따라 돌아오는데 앞서가던 차가 안보이고 길옆에 사람이 쓰러져 있어요. 같이 술자리에 있던 사람예요. 길옆 25m 낭떠러지에는 차가 곤두박질 해있고…절벽을 내려가 두 사람을 끌어올려 해군병원으로 보냈지요.
두 사람은 며칠만에 깨어나 생명을 건졌지만 이같은 보고를 받은 권중돈국방장관이 해군총장 발령장을 찢어 버리며 노발대발 했대요. 최경록육군총장도 나와 김준장의 옷을 벗기겠다고 야단예요. 다행히 친하게 지내던 김형일 참모차장에게 연락해 수습할 수 있었고 김준장과는 더욱 친하게 됐읍니다.
그 뒤 보안사령관 등을 지내고 건설부장관이 된 김재규는 내가 자유중국대사를 하고 있을 때 매년 한번씩은 들러가곤 했습니다. 김재규가 나에게는 총을 쏠 수가 없는 처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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