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불만무마…「제2의출발」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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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9일 발표된 필리핀 내각의 총사퇴는 지난달 28일 쿠데타가 불발로 끝난이후 혼미를 거듭해온 필리핀 정국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해줄 것으로 보인다.
「아키노」대통령 집권이후 최대의 위기로 여겨져 왔던 이번 쿠데타이후의 필리핀 정국은 군부·내각·의회·실업계등 사회각계의 심한 분열로 인해 자칫 애써 얻은 민주화가 산산이 부서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진한 우려를 자아냈었다.
이번에 사퇴하는 관리들중에는 「아키노」정부에 대한 각계의 비난을 악화시켜온 「호커·아로요」비서실장과 「록신」보좌관등이 포함돼 있어 그동안 빗발쳤던 군부·경제계·종교계·의회의 대정부 압력과 비난에서 일단 벗어나 「아키노」정부가 나름대로의 진로를 선택할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지난8월의 불발쿠데타로 각계각층에서는 군부내의 터질듯한 불안과 분열을 종식시키고 공산위협을 억제하기위해 시급히 정부 정책을 바꿔야한다는 요구가 강하게 대두됐으며, 「라우렐」부통령이 최근 군법영에서 가진 군인들과의 대담에서도 「친공적이며 반군부 세력인「아로요」실장과 그밖의 인사들을 축출해 국민이 원하는 제대로의 갈길을 필리핀이 걷게해야 한다는 요구가 개진됐다.
필리핀은 「아키노」집권 이후에도 갖가지 심각한 국내문제에 시달려왔으며 이번 쿠데타는 비록 불발로 끝나기는 했으나 갖가지 문제에 대처하는 「아키노」정부의 정책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할수 있는 중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정부를 지탱해주는 「민중의 힘」이 혼들리고 있다는 큰 충격을 안겨줌으로써 앞으로의 필리핀 민주화 장정에 검은 구름이 끼어있음을 시사해주었다.
필리핀은 그동안 끊임없는 공산게릴라들의 공격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당해왔으며 모로인민해방전선을 주축으로한 회교 반군들도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반란을 계속해왔다.
이중 중요한 현상은 군부의 폭넓은 불만이다.
이번 쿠데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군부대들은「아키노」정부에 대한 충성을 행동으로 표시함으로써 민간정부우위원칙의 기본골격은 건재하고 있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초기 진압작전이 일단 성공한 다음 군부의 여러갈래에서 그동안 쌓였던 불만들이 터져나와 문제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군의 불만은 「아키노」정부가 공산반군 퇴치활동에 적극성이 적다는 점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기본적 불만에 덧붙여 투항해온 공산반군에는 정착자금을 주는등 후하게 대우해주면서 이들을 퇴치하는 군에는 지원을 인색하게 해준다는것 등이다. 탄약·장비가 부족하고 심지어 군인이 사는 막사까지도 보수하지않아 노후화되어 있다는 불만까지 나왔다. 또 공산퇴치 작전에서 희생된 군인의 미망인이 생활이 어려워 사창가로 전락하는 경우까지 있다는 지극히 자극적인 불만까지 표출됐다.
「아키노」정부를 지켜준 군대로부터 나온 이와같은 불만은 아직도 필리핀내 비밀기지에서 반격의 기회를 노리는 「호나산」대령 주도의 쿠데타 잔존세력이 남아 있고 언제 다시 행동으로 나타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필리핀을 더욱 혼미의 소용돌이 속에 빠뜨렸다.
이러한 위협앞에서「아키노」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결단성 있는 대책을 세울 능력이 없지않나 하는 좌절감이 민간인들 사이에서조차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키노」 대통령은 이러한 군민사이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9일 내각 총사퇴를 단행한 것이다. 이번 조치는 그런뜻에서 「아키노」정부의 제2의 출발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이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돼 「아키노」정부의 「무능」이 크게 부각되기는 했지만「아키노」대통령이「마르코스」축출 후에 이루어 놓은 실적은 대단한 것이다.
「아키노」대통령은 「마르코스」의 13년계엄통치를 치유하기 위한 기본골격을 지난 1년반동안에 복구시켰다. 새헌법을 제정하고 선거법을 정화시켰으며 새 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와같은 굵직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르코스」시대에 억제되어온 민생문제들에는 손도 제대로 대지 못한것이 이제와 서 커다란 도전으로 나타나게 됐다.
필리핀사태의 가장 중심과제로 손꼽히는 토지개혁 문제가 두드러진 예다. 「아키노」는 이 문제가 갖는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1월 대통령궁앞에서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시위하던 농민들중 19명이 경호원의 총에 맞고 쓰러지고서야 토지개혁안을 서둘러 마련했다.
이개혁안은 토지소유 상한선을 대지주가 많은 의회가 결정하도록 일임한데 대해 농민들의 불만을 사고있다.
쿠데타 기도 직전에 있었던 기름값 인상에 대한 노조의 격렬한 반발파업도「아키노」대통령이 미리 설득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초한 위기였다는 비판이 나돌고 있다.
「아키노」대통령은 이번 개각으로 그동안의 실책에 대한 책임을 측근에게 미루고 자신의 리더십을 다시 확립하려 하고있다.
앞으로의 필리핀 사태는 「아키노」가 일반국민들로부터 새로운 불만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도에서 군부의 불만을 얼마만큼 수렴할수 있느냐는, 독재 유산을 물려받은 민주정권이 으례 당면해야 하는 델리키트한 과업을 잘 수행해 나가느냐에 달려있다. <고혜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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