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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의 원점] '과거' 숨기기 급급한 日 … 섬 상륙 막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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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추도(追悼). 나가사키 원폭 조선인 희생자. 1979. 8. 9."

이것이 비문의 전부입니다. 평화공원과는 멀리 떨어진 후미진 자리에 흐느낌처럼 서 있는 검은 돌비석입니다. 1m 남짓한 이 작은 추도비의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원폭으로 죽어간 이름도 없는 조선인을 위하여, 이름도 없는 일본인이 속죄의 마음을 바쳐서."

바로 시민단체 '나가사키(長崎) 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에서 거리모금까지 해 가며 세운 사죄의 추모비입니다. 흰 국화를 바치는 것으로 저는 그날을 시작했습니다. 비석 옆에는 일본 각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접은 종이학들이 수천마리 쌓였고, 다른 한쪽에는 누군가가 가져온 대형 태극기가 그 종이학들을 껴안듯 감싸고 있었습니다.

군국주의 일본에 끌려가, 얼마나 많은 조선의 넋들이 신음하다가 목숨을 다했는지 모릅니다. 이국 땅 곳곳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다 죽어간 사람들, 피폭자들. 주검조차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땅에 묻힌 사람들의 몸 위에서는 봄이면 풀이 자라고 겨울이면 나무뿌리가 뼈를 파고들며 흙이 되어갔습니다. 화장된 뼈는 항아리에 담겨진 채 절간 지하에서 거미줄에 감기고 먼지에 쌓여 긴 세월 동안 버려졌습니다. 그 항아리에 써 있는 것은 암호와 같은 숫자뿐, 그리고 '조선'이라는 글씨가 더러 보일 뿐입니다.

다음날 저는 통한의 섬 하시마(端島)로 향했습니다. 군함이 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군함섬'이라고도 불리는 이 섬은, 섬 전체가 탄광입니다. 1974년 폐광이 결정되면서 이 섬은 무인도로 변합니다. 2층에서 9층까지 광원 아파트가 숲처럼 우거졌던 섬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미쓰비시 소유였던 이 무인도는 지금 나가사키시에 기증되어, 허가를 받아야 상륙이 가능합니다. 건물이 무너질 염려가 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상륙허가를 내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역사의 치부를 감추려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배를 타고 섬을 돌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 세워진 무인 등대가 하얗게 바라보였습니다. 배가 섬에 다가가면서, 도괴 위험이 있는 건물을 아예 철망으로 뒤집어씌워 놓은 게 보였습니다. 일본인 광원 아파트와는 멀리 떨어져서 조선인 징용공들이 있던 기숙사와 식당으로 쓰여졌던 두 동의 건물도 까맣게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취재를 갈 때면 여러 차례 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하시마에도 함께 올라가 이곳저곳을 설명해 주었던 서정우씨. 그러나 그는 2년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하시마로 끌려와, 지하 7백m 해저탄광에서 참혹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몇 번이나 '죽자. 죽어 버리자!' 생각하며 거닐었다는 방파제를 가리키며 그때를 증언해 주던 서정우씨. 다시 나가사키 조선소에서 철판 자르는 일을 하다가 원폭을 맞아 거의 한쪽 폐가 없는 몸으로 살았습니다.

막노동과 입원생활을 되풀이하면서도 그는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에게 조선인 피폭자의 실상을 증언하는 일을 평생 계속했습니다. 마지막 만났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아들 쌍둥이가 다 가출해 버리고, 아내와도 헤어져 그는 병든 몸으로 혼자 궁핍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헤어지는 저를 배웅하며, 잠옷 바람으로 먼 전차 정류장까지 따라나와 오래오래 손을 흔들며 서 있던 그였습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살아서 걸어다니는 과거'들이 이렇게 사라져가고, 한국 피폭자 문제는 역사에 묻혀 버리는지도 모릅니다. 그때였습니다.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이 검게 색깔이 변해가고 있는 아파트들 사이로 제 소설'까마귀'의 주인공 '우석'이 저벅저벅 걸어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어린 광원 '성식'이가 술에 취해 '고향에 보내 줘요'하며 울던 자리.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편지를 읽으며 '지상'이 통곡하던 바로 그 자리도 보입니다. 광업소와 목숨을 건 싸움 끝에 수십 명을 탈출시킨 '동진'이 결국 두 손이 포승줄에 묶인 채 형무소로 향하며 서 있던 부교(浮橋), 그건 자취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금화'가 있었습니다. 바다로 몸을 던져 자살한 그 방파제 위에서 '금화'가 치마 저고리에 긴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서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까. 이제 하시마는 무인도, 상륙불가의 폐허의 섬입니다. 그러나 저의 가슴 안에서는 제 소설의 주인공들이 살아 숨쉬는 섬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1939년 시작된 조선인의 강제 연행은 45년까지 1백만명을 넘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44년 9월에는 '일반징용령'을 적용, 1년 남짓한 기간에 40만명 이상을 강제로 끌어갔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응징사(應徵士)'라고 불렀습니다. 일본군의 성노예를 '종군위안부'로, 식민지 시대의 사죄를 '통석(痛惜)의 염(念)'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가증스러운 말장난입니다.

그날 밤늦게 저는 혼자 조선인 피폭자 추도비를 찾아갔습니다. 내가 어제 바쳤던 국화는 어느새 시들고 있었습니다. 공원의 여기저기에서 외등이 비추고 있는, 추도비 앞 계단에 나는 오래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이 추도비 하나가 서는 데 30여년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60년 가까이가 되어서 겨우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저는 '까마귀'라는 이름으로 펴냈습니다. 겨우 이야기 하나가, 여러분들이 '어머니'하고 부르며 스러져간 그 모국어로 말입니다.

흐려오는 눈길로 폭심지의 돌기둥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떻게 만들고 지켜온 조국입니까. 하거늘, 무엇이 청산되었다고, 어느새 일본의 과거사를 말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식민지 시대에 철도도 놓고, 길도 닦으며 잘해 주지 않았느냐는 일본의 망언이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가.세종대 교수>

사진=이시타 겐지(石田謙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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