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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무협영화 무극 천카이거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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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사진=김성룔 기자]

"데뷔작 '황토지'(1984년)는 단돈 35만 위안(4200여만원)으로 만들었다. 당시 중국에는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시장'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지금은 다르다. 아직도 영화는 돈 많은 사람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지만, 어쨌든 시장이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의 길을 가기 위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요소다. 이 시장이 발전하려면 많은 관객이 중국 영화를 보게 해야한다. 지금은 작은 영화가 아니라 대규모 자본을 들인 큰 영화로 관객을 끌어들여야 할 때다."

영화 '무극'(26일 개봉)을 들고 한국을 찾은 중국 감독 천카이거(陳凱歌.54)의 말이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패왕별희'(93년)를 정점으로 한때 세계영화제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그는 이제 확연히 다른 목표를 지향한다. 바로 시장이다. 300억원의 제작비가 든 대작 '무극'은 실제로 지난 연말 중국 개봉 첫날 사상 최고의 흥행수입을 기록했다.

갖은 부귀영화를 누리되 사랑하는 사람을 번번이 잃게 되는 운명인 왕비 칭청(장바이즈)를 두고 순진무구하고 충직한 노예 쿤룬(장동건)과 용맹스럽지만 정직하지 않은 장군 쿠앙민(사나다 히로유키)이 벌이는 사랑 얘기다. 가상의 시공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감독은 정교한 줄거리나 인물에 대한 성찰 대신 대규모 컴퓨터 그래픽(CG)과 무협 액션에 힘을 실었다. 그의 이전 팬들에게는 아쉬울 일이지만, 급속히 성장하는 중국 영화시장에 대한 그의 시각은 뚜렷했다.

-장동건에게 들으니 당초 장군 역으로 캐스팅했다가 배역을 바꿨다고 하더라.

"영화 '친구'에서 칼에 찔려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저렇게 잘 생긴 배우가 장군 역할을 한다면 참 흥미로울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첫 만남에서는 그 순수하고 맑은 눈빛에 매료됐다. 마치 말의 눈빛 같았다. 그래서 역할을 바꿨다. 실제 촬영하는 동안에는 겸허한 모습에 놀랐다."

-영화 전체에 판타지적인 성격이 강하다. 이제까지 작품 중에 컴퓨터 그래픽(CG)을 가장 많이 쓴 것 같다.

"사실상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 힘들었다. CG로 처리하는 화면이 너무 많았던 데다 기술적인 부분을 잘 몰라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결국 CG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걸 배웠다. 이번 영화에서는 동양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애를 썼다."

-아시아 3국의 배우.자본이 결합된 다국적영화를 만든 소감은.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 비해 아시아는 약세다. 그런 점에서 아시아 영화의 연합은 꼭 하고 싶은 작업이었고, 좋은 경험이었다. 다만 제작규모가 커지면서 감독이 해야 하는 일이 많아졌다. 다음에는 CG를 좀 덜 쓰고,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영웅''연인'같은 장이머우 감독의 무협과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당신만의 어떤 스타일을 보여주려고 했나.

"장이머우의 무협은 중국 전통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그 점에서 나랑 다르다. 내 스타일의 무협영화를 사실 아직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나는 무협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 표현되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특히 주인공들이 말이 없는 무협을 만들고 싶다. 내면은 고독하되, 그걸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얘기다."

-당신의 80년대 영화들은 세계영화제의 주목에도 정작 중국 국내에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소개되지 못했다. 반면 '무극'은 기록적인 흥행 성적을 거뒀다. 그 20여 년 사이에 무슨 변화가 있었나.

"좋은 질문이다. 세계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았지만 중국 내 관객은 없었다. 이제 시장이 생겨났다. 지금은 대규모 영화로 중국 시장을 성장시켜야 할 때다. 그러고 나면 지금의 젊은 감독들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 저예산 영화를 자유로이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당신도 다시 영화제에 나갈만한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다. 참고 있는 게 많다. 내 성장기 무렵을 영화로 만들고픈 욕심이 있는데, 아직 그걸 못해 괴롭다. 꼭 만들 것이다. 문화혁명 당시뿐 아니라 그 이전 이야기도 말이다. 개인의 운명이 사회발전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런 걸 그리는 영화를 다시 만들고 싶다."

그는 이번 영화에 여신 역으로 출연한 배우이자 프로듀서인 부인 첸홍과의 사이에 두 아들(5세.8세)을 두고 있다. 혹 배우로 키울 생각은 없는지 묻자 먼저 세상을 떠난 배우의 얘기가 나왔다. "웬만하면 안 시키려고 한다. 남들은 스타가 되면 걱정이 없을 줄 알지만 배우의 인생은 다음 작품 뭐할지, 어떻게 할지 걱정의 연속이다. '패왕별희' 당시의 장궈룽도 항상 긴장하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지금도 그의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사실 이번 영화에서도 '북공작' 역할을 맡기려고 했는데…."

글=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사진=김성룡 기자 <xdrag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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