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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인의 작가전] 인 더 룸 #12

중앙일보

입력

진율이가 갔다.
온기가 남아있던 의자도 이제 싸늘하다.

마지막 관객이 극장을 빠져나갔다. 도로에 무겁게 깔린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다 안주머니에 든 박하향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어두운 밤사이로 숨결과 하얀 담배 연기가 미련 없이 사라진다. 귓불을 얼얼하게 만드는 바람 탓에 몸을 움츠린 채, 녹이 슨 셔터를 내렸다. 끼리릭! 쇠 긁히는 소리가 경박하게 텅 빈 건물 안에서 요동쳤다. 출입문을 잠그려다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 바깥을 두리번거린다. 남루한 취객 하나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이리저리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때 심장이 고장 난 심야버스가 요란한 굉음을 내며 텅 빈 의자를 싣고 공허하게 건물 앞을 지나갔다. 도로 건너편의 상점은 편의점을 제외하고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교회의 붉은 십자가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풍경이다.

계단을 오른다. 이제는 복도에 발소리가 가득 찼다. 또 중학생 무리가 몰래 들어왔던 걸까. 바닥에는 침, 담배꽁초와 먹다 버린 음료수 캔이 한가득 어질러져 있었다. 상관은 없지만, 막상 치우려 생각을 하니 귀찮았다. 불 꺼진 건물 계단을 느릿느릿 올랐다. 옥상 문을 걸어 잠그고 얼어붙은 듯한 방문을 돌렸다.

'나는 혼자다.'

방안의 모든 것은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방 한쪽이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외투를 벗자 냉기가 훅하고 피부를 자극한다. 보일러의 전원을 누르자 파란 불꽃이 피어나고 온도계 눈금이 부들거린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 천천히 몸을 뉘었다.

진율이가 다녀가고 난 다음 날은 평소보다 방이 넓게 느껴졌다. 혼자 살기 시작한 것이 익숙해질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한 번씩 밀려드는 공간의 침묵 앞엔 무기력했다. 지잉하고 보일러 모터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함이 지분거렸다. 허전한 마음을 어디에라도 덜어내고 싶었다. 눈을 뜨고 한참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다시 연화의 방 안이다.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사방은 고요하고 어두움 속에 새근거리며 잠든 연화가 보인다. 달 같은 엉덩이가 반쯤 드러난 채 검은 머리가 배게 위로 다소곳이 늘어져 있다. 눈앞에 연화가 있다.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천천히 돌려 눕히고 민소매를 걷어 올렸다. 차가운 눈의 언덕처럼 창백한 연화의 가슴골이 보였다. 피부는 싱싱한 사과처럼 부드러웠다. 모든 게 어두웠지만, 연화의 존재감은 환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달빛에 창백한 연화의 몸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값비싼 대리석 조각상처럼 빛을 내며 나를 유혹한다.

아직 연화는 깊은 꿈속이다. 연화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쓰다듬었지만, 유두의 느낌이 점점 견고해졌다. 깼구나. 고개를 들어보니 놀란 연화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화의 입술이 움직인다. 나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으나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내지 못하게 연화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갰다. 연화는 나를 밀어냈지만, 팔을 뻗어 연화의 팔을 침대에 붙였다. 부드러운 입술에 정신이 팔렸을 때 연화가 내 혀를 깨물었다. 나는 하던 것을 멈추고 연화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연화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연화의 하얀 가슴 위에 핏방울이 떨어졌다.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모양이다. 나는 붕대를 풀고, 잘린 손가락을 꺼내어 연화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한참 동안 서로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연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연화의 볼에 손가락을 가져가 눈물을 만졌다. 미끈거리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반바지를 끌어내렸을 때 연화는 저항하지 않았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몸을 포개고 연화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연화의 체온이 느껴졌다. 연화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쌌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연화가 흐느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계속 연화의 안을 헤매고 있었다. 분노인지 쾌감인지 모르겠는 것이 아랫배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사정이 가까워져 오자 문득, 연화와 눈을 마주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오른 것이 성기를 통과하는 순간, 얼굴을 감싸고 있던 손을 뜯어내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몸 아래 있던 사람, 연화가 아니다.

'누구지?'

불을 켜고 찝찝한 마음을 느끼며 손에 묻은 정액을 천천히 닦아냈다. 무슨 일인지 몰라 어색함을 느꼈다.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한참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기 여자도 와?"

오래된 벽화같이 황량한 눈빛이 나와 마주쳤다. 고개를 숙이면 겸손해 보이는 콧날, 잘 움직이지 않던 윗입술과 도드라진 아랫입술이 부자연스러웠던 여자. 한참 동안 다듬지 않은 듯한 검고 짙은 머릿결.

그 여자다.

왜 오는 걸까.

하품을 연이어 계속했다. 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그때 매표소 밖으로 나와 무료하게 사람들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때,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은 입구를 지나 검은색 허리가 살짝 들어간 패딩 잠바를 입은 여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헬스클럽 회원 모집이나 신용카드를 만들라며 젊은 여자들이 간혹 매표소로 오곤 했다. 여자의 분위기는 이곳에서 마주칠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 때문에 왔을까. 걸음걸이가 너무 위태로워 파트너 없이 허공을 상대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내 시선을 피하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저... 얼마죠?"

"네?"

"영화 표... 주시겠어요...?"

정확하게 영화 표를 달라고 이야기했다. 잠깐 멈칫하다 서둘러 매표소 안으로 들어갔다. 매표구에 가녀린 그녀의 손이 지폐와 함께 들어왔다가 건넨 표를 가지고 객석 방향으로 사라졌다.

뭐였을까. 여자라면, 몸 파는 여자라면 바로 분간할 수 있었다. 지긋한 나이를 진한 화장으로 감추고, 매연에 찌든 듯한 눈으로 "연애할래요?"라고 내뱉는. 상영관 안에서 허탕을 치고 나온 여자들이 가끔 내게 묻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그런 모습을 그녀에게 찾을 수 없었다.

표를 산 것 외에 그녀에 대해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극장 안이 평화롭다고 말하긴 힘들다. 자칫 몸 파는 여자로 오해해 그녀에게 누군가 수작을 부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극장 안 신음 소리가 신경 쓰였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극장 안으로 관심이 쏠렸다.

영화가 끝나자 멀쩡하게 걸어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사라졌지만, 그녀가 다녀간 뒤로 극장이 위험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오래된 고목같이 경직된, 검은색 옷을 입거나 짙은 선글라스를 쓴 남자, 중년 남성들이 찾는 곳이 이곳 '오션 시네마' 다. 모두 같은 표정으로 노송의 껍질을 입은 사람들이다. 언제부턴가 그들의 얼굴 켜켜이 박혀있는 사연을 조금씩 감지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 주름 사이에 박혀있는 권태를 읽기 시작했다. 모두 똑같은 냄새가 나는 듯해 처음에는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그들 모두 제 과거의 그림자를 찾아 이곳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듬을 잃어버린 댄서처럼 욕망과 엇박자의 춤을 추다, 스텝이 엉켜 스테이지 바깥으로 밀려난 듯, 변두리의 음침한 극장 의자 위에서나 젊은 시절의 화려함을 되새김질하는 듯 보였다.

어떤 이는 아직 들끓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해 이곳으로 오지만, 어떤 이는 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혈기를 추억했다. 그들의 청춘을 이 후미진 극장에서 발견했다. 혼자서 그어대던 스케치북 위의 늘어진 선이 처음엔 모두 같았지만, 비슷한 체형의 그림자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깊이가 다른 선을 발견했다. 이제 그림은 제법 음울의 깊이를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팽팽한 청년의 얼굴이 세월의 잽을 견디지 못해 기타 줄처럼 늘어졌고, 그 줄은 각자 다른 소리를 냈다. 늘어진 선은 명징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여자는 그 후로도 이곳에 왔다. 여기서 누군가를 만나는 걸까.

성인영화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왔다는 것은, 그녀도 욕망 어딘가를 채우러 오는 것인지도 몰랐다. 쉽게 수위가 높은 포르노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노골적인 얼굴이 아닌 흔들리는 걸음걸이를 하고, 가득 채우는 신음소리가 피부 여기저기에 처박히는 영화관에 왜, 그녀가 왔을까.

혹시 흥미로운 기삿거리를 찾는 기자나 실연당한 사람일까.

영화가 끝나고 들어갔던 사람은 모두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나오지 않았다. 지금쯤 많이 어두울 텐데, 무슨 짓이라도 안에서 벌이는 걸까. 시간이 좀 지나자 참지 못하고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구석에 회색 목도리를 둘둘 만 채 얼굴을 가리고 앉아있는 그녀가 보였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내 쪽을 바라봤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듯 서둘러 일어나 총총거리며 문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다음, 그다음에도 그녀가 돌아갈 때를 유심히 보았지만, 항상 혼자였다.

"성인 한 장이요."

그녀는 이제 제법 익숙하게 표를 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행동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녀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라디오에선 디제이가 청자와 갈등이 깊어진 부모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창이었다. 울먹이며 사연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기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요?"

"네?"

"궁금해서 여쭤보는 거예요."

여자의 눈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 아뇨. 그냥 영화 보려고..."

처음 온 날처럼 다시, 자신감 없는 목소리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여기 오지 마세요."


작가 소개  
조금 어린 나이의 결혼 그리고 빠른 나이의 이혼, 통신회사, 콜센터, 어학원 운영 중 경영악화로 빈털터리가 됨. 2년간 낙오자라는 패배감으로 자폐적인 시간을 보내던 중 무작정 세계 여행을 시작. 1년 정도 해외 여행 중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 성을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망하는 시와 수필을 SNS에 연재 중이다.

<아스팔트에 핀 꽃> 동인 시집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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