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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는 고전의 풍경을 그저 지나갈 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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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호 30면

서독일 방송교향악단과 함께 쾰른을 대표하는 양대 오케스트라인, 쾰른 필하모닉이 10일 예술의전당에서 3년 만에 두 번째 내한 공연을 갖는다. 2014년 전임 감독 마르쿠스 슈텐츠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으로 국내 애호가들을 매료시킨 데 이어, 2015년 쾰른 필의 새 감독에 오른 파리 출신 프랑수아 자비에 로트가 서울-베이징-상하이를 아우르는 2월 아시아 투어를 이끄는 것이다.

쾰른 필의 독일어 명칭은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다. 귀르체니히는 1400년대 중엽에 지어진 시립 연회장의 건물명으로, 당시 부지를 소유했던 귀족 가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2차 대전 기간 연합군의 폭격으로 건물이 완파됐다가 종전 후 복원되었고 쾰른 필의 근거지로 오랫동안 쓰였다. 지금은 1986년 개관한 쾰른 필하모니에서 정기 연주회를 연다.

쾰른 필하모닉과 협연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빌데 프랑

쾰른 필이 2010년대에도 독일권 10대 명문악단으로 손꼽히는 요인이 바로 이 쾰른 필하모니와의 궁합이다. 라인 강의 밑바닥을 파헤치는 형태로 완성한 공연장의 어쿠스틱은 여러 거장 지휘자들이 칭송했고, 역대 쾰른 필 감독들의 예술 방향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특히 1986년부터 4년간 오케스트라를 통솔한 마렉야노프스키는 프랑스식 관악기를 배제하고, 귄터 반트 감독 시절(1945~1974)부터 관습적으로 이어온 기법을 존중하면서, ‘독일색’으로 악단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1990년대 고풍스러운 쾰른 필의 음향은, 서독일 방송교향악단이 가리 베르티니의 세련된 말러로 대외 위상을 견지한 행보와 대비됐다.

자비에 로트와 두 시즌을 보내는 쾰른 필 사운드는 생물처럼 변모하고 있다. 베토벤 교향곡 전곡 연주와 더불어 자비에 로트는 자신이 감독하는 역사주의 연주단체 ‘레 시에클’에서 차용한 아이디어를 쾰른 필의 현대 관현악에 도입했다. 목·금관의 소리를 혼합하는 방법에서, 단원의 감정을 중시하는 감독을 만나게 되자 쾰른 필의 소리는 한층 가볍고 분방해졌다. 전통에 혁신을 더하려는 자비에 로트의 방향은 신임 플루트 수석 조성현이 누구보다 먼저 감지할 것이다. 서울 공연에선 베베른 파사칼리아와 브람스 교향곡 2번이 연주된다.

쾰른 필하모닉

쾰른 필하모닉

[2008년 EMI 데뷔후 인기 상승곡선]

전반부에는 빌데 프랑(Vilde Frang, 31)이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다. 노르웨이 오슬로 태생의 프랑은 2008년 EMI 레이블 데뷔 이후 별다른 부침 없이 지속적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콩쿠르 우승자들이 보통 특전으로 주어지는 공연 이후 재초청을 받지 못하면 경력 관리에 애를 먹는 데 비해 프랑은 마리스 얀손스, 안네 소피 무터의 후광을 통해 관객과 만난 다음, 2012년 하이팅크/빈 필부터 2016년 래틀/베를린 필 협연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컬러로 커리어를 축적했다.

유럽 음악계가 프랑을 높게 평가하는 가치는 신선함이다.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해석도 괴팍하게 들리지 않는다. 보통 연주회에서도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공연에 임한다. 성격이 온화하고 긍정적이어서 주변에 자연스레 사람이 모인다.

사물과 주변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이 결국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한다. 2012년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 필즈(ASMF)와의 협연을 위해 인천공항에 내린 프랑은 영종대교를 지나면서 "창 밖에 펼쳐진 갯벌의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환경의 소중함을 음악으로 그리고 싶다"고 했다. 영국의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프랑의 음악을 ‘오가닉’으로 묘사한다. 쾰른 필과의 협연을 앞두고 베를린 자택에서 프랑을 전화로 만났다. 

[발레에 대한 사랑은 지금도 여전]

서울시향, ASMF, 경기 필과 협연하고 이번이 네 번째 한국 방문이다.
"독일에는 좋은 한국 음악가들이 많아서 서울이 멀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비빔밤은 이번에도 꼭 맵게 먹고 싶다. 클라라(주미 강)도 요즘 베를린으로 이사했다고 들었다."

거주지를 베를린으로 옮겼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클래식 연주자가 영감을 얻는 데 베를린만한 곳은 없다. 이곳 같이 훌륭한 공연이 매일처럼 열리는 곳도 없다. 아티스트가 동료를 만들고 고민을 나누고 미래를 설계하기에 베를린은 최적의 장소다. 개인적으로는 이사를 오다 발톱이 빠져서 여러 공연을 취소하기도 했다."

어릴 때는 발레와 바이올린 사이에서 진로를 고민했는데.
"열 세 살에 진로를 택해야 했다. 그 때는 자연스러운 게 바이올린이라 믿었다. 곧바로 준비해야 했던 얀손스/오슬로 필하모닉 공연 때문이었다. 발레는 지금도 사랑하고 안무 짜는 법도 마찬가지다.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녹음하면서 그런 관심들 덕분에 큰 도움이 됐다."

이번에 연주하는 곡은 베토벤 협주곡이다.
"10살이 되기 전에 여러 음반으로 들었지만 내 곡으로 만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베토벤을 이해하기 위해 경륜이 필수적이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이제 서른이 넘었고 나만의 베토벤을 연주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본다."

왜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젊을 때에는 베토벤 협주곡 연주를 피하나
"미성숙이 이 곡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협주곡이 없다. 어제 연주한 곡도 부끄러워서 바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그렇게 아티스트의 모든 게 노출된다. 테크닉과 정서, 악단과의 호흡 무엇 하나 바이올리니스트가 확고하지 않으면 듣기도 불편하고 연주도 그렇다."

보통 연주에서 과도한 제스처도 없고, 꾸밈음도 남용하지 않는다.
"고전에 오른 작품들 자체가 텍스트로서 이미 힘을 갖고 있다. 연주자는 그 풍경을 지나갈 뿐이다. 이미 여러 전문가들의 연구가 축적된 고전이나 낭만주의 곡보다는 현대음악에서 연주자의 노력이 이어져야 한다."

비평가들은 당신의 연주가 구성은 촘촘하지만 자유로운 정신이 있다고 한다.
"무반주 독주곡을 연주할 때 스케일을 크게 가져가는 편이다. 곡을 긴 호흡으로 펼치면 그 사이를 세밀하게 채우면서, 춤 출 수 있다.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가 그런 경우인데 하나하나 벽돌을 쌓아서 성당을 짓는다는 생각을 하면 호흡이 정리되고 몸이 움직인다."

향후 음반도 비인기곡과 인기곡을 함께 채우는 방식이 될 것인가.
"멘델스존 실내악을 준비하는데 대중적이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지금까지 팔린 음반들의 실적을 관계자들이 잘 봐주면 좋겠다. 그 앨범으로 친구들과 연주 여행을 갔으면 한다."

글 한정호 공연평론가 imbreeze@naver.com, 사진 빈체로 ⓒ Marco Borggr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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