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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납비리 엄단한 판사, 법복 벗고 방사청 팀장간 이유 묻자…

중앙일보

입력

 

정재민 판사

군부대 식품 납품비리를 저지를 식품 업체 대표에게 검찰 구형보다 2배 많은 징역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법복을 벗었다. 그리고 선택한 곳이 방위사업청 '원가검증 팀장'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의정부지법 형사2단독 판사였던 정재민 판사다. 그는 지난 1일 몇몇 자신의 SNS에 이같은 사실을 올리고 “2월 9일자로 십여년간의 판사 생활을 마치고 같은 날부터 방위사업청 원가검증팀장으로 법률가가 아닌 행정관료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방사청은 무기와 장비를 국내외에서 사고 우리업체의 무기와 장비를 외국에서 파는 활로를 개척하는 일을 한다”며 “저의 첫 부서인 원가검증팀은 잠수함 비행기 등이 업체가 제시한 그 원가를 들여서 만드는 것인지 실사를 통해 검증하고 세금이 새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을 한다”고 말했다.

정 판사는 지난 1월 입찰방해·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된 A식품 대표인 이모(65)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앞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1년 6개월보다 두 배 많은 형량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정 판사는 “군 장병들의 먹거리에 관한 비리라는 점에서 죄질이 더욱 나쁘고 구형량이 지나치게 낮다”고 양형이유를 설명했다. 이모씨는 지난 2013년 2월 통조림을 생산하는 업체를 운영하는 자로 김치 통조림 등 식품을 납품하는 해군 입찰에 참가하면서 유찰을 막기 위해 자신의 부인 이름으로 된 유령회사를 들러리로 참가시켜 9900만원에 낙찰받았다. 2014년 5월 방위사업청의 딸기잼 입찰에서 납품실적 부족으로 탈락하자 허위 서류를 꾸며 재입찰해 선정되기도 했다.

정 판사는 자신이 법복을 벗게된 계기에 대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이 내 가치를 높이고 내 인생을 덜 허무하게 만든다는 것이 방사청 행의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는 “왜 가느냐고 묻는 사람, 이해가 안된다는 사람이 많다. 부와 명예나 권력을 향상시키는 것 외에는 직업선택의 이유가 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라며 “무엇보다 내가 이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제는 철저히 주체적으로 살고 싶어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방사청에서 무기를 사고 팔고 개발하는 일은 보기보다 엄청 전문적이고 재밌다. 구축함이나 헬기 프라모델을 만들어도 뿌듯한데 실제로 그걸 만든다고 상상해보라”며 “그간 국방부, 외교부에서 4년간 있으면서 행정부 일의 스케일과 재미를 부러워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정 판사는 지난 2009년 독도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국제 소송문제를 다룬 소설  『독도 인 더 헤이그』를 발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지난 2011년 당시 이기철 외교부 국제법률국장이 읽고난 뒤 정 판사에게 외교부 근무를 제안했다.

정 판사는 자신을 유명하게 한 군납비리 판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내가 맡은 재판부에서 2년 동안 재판한 것이라 판단은 오래 전 숙성된 것이었다. 다만 곧 방사청에 가는데 중립성에 오해를 받지 않을까 해서 다른 판사님들과 후임에게 미룰지를 두고 상의했었다”며 “원칙대로 내가 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형량 역시 동료들과 상의해서 정했다”고 밝혔다.

정 판사는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사시 42회 출신이다.

이지상 기자 groun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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