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과 전 세계의 존경을 받았던 한국인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사진 중앙포토] 故 이종욱 박사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 것입니다"

UN과 전 세계의 존경을 받았던 한국인이 있다.

전 'WHO(World Health Organization,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이자 한국인 첫 UN기구 수장이었던 故 이종욱(1945-2006) 박사가 바로 그다.

'Man of action'이라 불렸던 그는 '생각'을 '실천'으로 옮겼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종욱 박사는 과거 남태평양 작은 섬 사모아 나환자촌의 한 동양인의사였다. 이후 WHO 본부 예방백신국 소아마비 발생률을 현격히 낮춘담당 국장이 되었고 2003년 WHO 사무총장에 당선된다.

사실 처음부터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다. "내가 처음에 WHO에 취업한 것은 월급이나 여러 가지 조건이 좋아서였다. 숭고한 사상을 가지고 취업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그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별명대로 옳다고 '생각'하던 것을 '행동'으로 옮겼다. 이종욱 박사는 일 년 중 150일 출장을 갔다. 30만 km의 비행을 하였지만 이등석 좌석에 두 명의 수행원이면 족했다.

WHO 사무총장 취임과 함께 그가 내걸었던 공약이 있다.

"2005년까지 300만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치료제를 보급하겠다"라는 것.

하지만 예산확보가 어려웠고 환자 대부분이 의료체계가 빈약한 아프리카 회원국에 속해있었던 탓에 불가능한 공약이라는 직원들의 우려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종욱 박사는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과연 옳은 일이고 인류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만 고민해야 해"라는 자신의 신념대로 움직였다.

우려했던 대로 300만 명 중 200만 명에게는 치료제를 보급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패를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적어도 실패는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라는 그의 말처럼.

실패의 결과는 놀라웠다. 에이즈 치료제를 지급 받은 100만 명의 환자가 있었고 아프리카 에이즈에 대해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이 증가한 것이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그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국가원수를 만나고 대접을 받다 보면 교만해지고 건방져질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끊임없이 경계했다.

이종욱 박사는 항상 낮아질 준비를 하고 지냈으며 결국 자신의 생각대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지 1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그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있을 뿐 아니라 확장되고 발전하고 있다.

[사진 EBS '지식채널 e']

임유섭 인턴기자 im.yuseop@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