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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리더라면 국익 위해 재선 실패 리스크 질 줄 알아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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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호 10면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독일을 ‘유럽의 패자(覇者)’로 바꿔놓은 건 ‘어젠다 2010’으로 불리는 국가개혁안이다. 고실업과 저성장에서 벗어나기 위한 과감한 국가개조 정책이었다.


실업 수당을 축소하고 부당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등의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하르츠 개혁), 재정적자의 주범인 의료보험·연금 혜택을 축소해 사회보장 지출을 줄이는 것 등이 골자다. 이 개혁을 주도한 건 사회민주당 소속의 게르하르트 슈뢰더(1998~2005년 재임) 총리였다. 하지만 개혁은 반발을 불렀다. 사민당의 지지가 주된 기반이던 노동조합뿐 아니라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당 내부에서도 반대자가 속출했다.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슈뢰더는 개혁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독일은 경제가 회생하면서 유럽의 중심 국가로 부상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슈뢰더는 내각에서 불신임당했고 국민의 인기를 잃어 우파인 기독민주당(앙겔라 메르켈)에 정권을 내줘야 했다. 자신의 정치 인생에도 종지부를 찍었다.


중앙SUNDAY 취재팀이 이 극적 스토리의 주인공인 슈뢰더 전 총리를 찾은 건 ‘국가 대개조(리셋 코리아)를 위해 정치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에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지난해 11월 15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연방의회 의원 사무실에서다. 슈뢰더 전 총리는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국익을 위해 재선 실패의 리스크를 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권형 개헌 논의와 관련해선 “한국의 경우라면 강력한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의회에 더 많은 권한과 책임을 나눠주는 시스템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의회 안에서 합의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되게끔 협치를 제도화해야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대통령은 현행대로 직선으로 뽑고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하는 분권형 협치 모델이다.


인터뷰는 슈뢰더 전 총리 측 요청에 의해 ‘남경필 경기지사가 묻고 슈뢰더가 전 총리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남경필(바른정당) 지사가 4년째 경기도에서 더불어민주당과의 대연정(大聯政)을 이어오고 있는 것을 협치의 모델로 평가해서다.


-전 세계적으로 포퓰리즘과 민족주의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결정),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 취임 등 예견치 못한 변화가 일고 있다. 독일도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인기를 얻고 있다. 이유가 뭘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세상이 글로벌화하면서 점점 복잡해지고 투명하게 보는 게 어려워져 글로벌화의 장점이 뭔지 정확히 짚어낼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니 글로벌화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포퓰리스트들은 복잡한 문제에 단순한 해답이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세상에 간단한 해답은 없다. 둘째는 노동시장의 지형이 변화하면서 일자리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때문이다. 글로벌화 초기엔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글로벌화가 진행할수록 사람들은 더 퀄리파이되고 결국 양질의 일자리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를 위시한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정치적 결정에 의해 잃어버린 일자리를 되돌릴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한다. 철광·석탄 같은 전통 산업들을 새롭게 부흥시킬 수 있을 것처럼 얘기한다. 사회적으로 위치가 강등되거나 복지가 줄어들까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한 방에 이것을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포퓰리즘이다.”


-책임 있는 정치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인내심을 갖고 이런 복잡한 관계와 맥락에 관해 설명하고 이해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한데 독일의 경우 중소기업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역량 있는 기업이 더 많이 생겨나야 하고, 전문 자격 요건을 갖춘 인력을 양성해야 하며 미래의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투자해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정치가 정책을 통해 지원한다면 새로운 일자리로 연결되고 좋은 정책으로 평가될 것이며, 이를 통해 포퓰리즘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포퓰리즘을 이겨내는 데 왕도가 있는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훌륭한 정치인은 선거에서 표를 얼마나 얻느냐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좋은 개혁을 하는 사람이란 생각을 갖게 된다. 한국도 실업, 특히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이 정말 변화하려고 한다면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대한 종속성에서 탈피하는 게 중요하다. 독일 경제가 잘 돌아가는 이유는 중소기업들이 대기업에 대한 종속성이 없고 자체 연구개발(R&D)을 통해 발전하는 강소(强小)기업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연장된 팔 하나’ 정도에 해당하는 종속성에서 벗어나는 게 시급하다. 진정한 히든 챔피언이 되게 해줘야 한다. 히든 챔피언은 기업을 육성하는 것만이 아니라 좋은 젊은 인재들이 매력을 느끼는 중소기업으로 가게 해야 한다. 한국은 좋은 인재들이 다 재벌기업으로 가지 않나. 대기업의 임금이 높으니까 그리로 몰리는 것이다. 그런데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중소기업들에 우수한 인재들이 모이고 거기서 충분히 보상받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슈뢰더 전 총리가 추진한 하르츠 개혁은 정치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포퓰리즘이 판치고 글로벌 경제위기가 확산되는 시기에 정치인들은 어떤 자세와 덕목을 가져야 할까.


“우선 문제가 뭔지 분석해야 한다. 우리가 어젠다 2010 개혁정책을 할 당시 독일은 실업자 500만 명의 시대였다. 뭔가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의료보험·연금보험·실업보험 같은 사회복지 제도를 위기에 강하게 해야 했다. 이를 위해 급여를 축소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국민들은 급여 축소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기를 피해갈 수 있도록 개혁을 해놓으면 유권자들은 화를 낸다. 정치인들은 필요한 개혁을 할 경우 선거에서 질 수도 있다. 누구 얘긴지 아시겠죠? 제가 선거에서 졌다. 정치인이라면 재선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만 변화를 해야 할 필요성이 너무 크다면 정치 리더는 재선에 실패할 수 있는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정치인에게 재선보다 중요한 것은 국익이라는 것이다. 국익을 잘 이해시키고 끈질기게 이것을 추구하는 정치인이라면 유권자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것이고 꼭 재선에 실패하란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했던 개혁이 독일을 유럽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프랑스는 기회를 소홀히 했고 그래서 현재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좋은 성과가 나려면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인간적 질문을 하나 하겠다. 국익을 위해 어려운 결정을 했고, 그 결과 선거에서 패해 정치를 떠났다. 국민에게 서운한 감정은 없었나.


“나라고 왜 선거에서 이기고 싶지 않았겠나. 나도 승리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패배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현역에서 물러나고 시간이 갈수록 ‘슈뢰더가 한 것이 독일을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니까 나를 선출해주지 않은 데 대한 서운함이 줄어들더라. 올해 72세인데 국민으로부터 ‘괜찮은 총리’였다는 평가를 받는 게 나쁘지 않다.”


1944년 독일 하노버에서 출생한 슈뢰더 전 총리는 대학(괴팅겐대 법학과) 졸업 후 사민당에 입당, 청년 당원으로 활동했다. 청년사민당 의장, 하노버 사민당 대표를 거쳐 연방 총리를 맡기 직전엔 니더작센주 총리(1990~98년)를 지냈다. 사민당의 ‘살아 있는 전설’인 그는 수많은 ‘슈뢰더 키즈’를 배출했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부총리겸 경제에너지부 장관,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외교장관이 대표적 인사다. 슈뢰더 전 총리가 직접 발탁한 슈타인마이어 장관은 슈뢰더 총리 시절에 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측근 중 측근이다. 마침 인터뷰 전날 대연정의 파트너인 기민당과 기독사회당, 사민당은 요아힘 가우크 대통령의 후임에 슈타인마이어 장관을 추대할 것을 합의했다(5월 23일 대통령 취임 예정).


-후진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 뿌듯할 것 같다. 정치적으로 어떤 소망을 갖고 있나.


“젊은 시절 꿈꿨던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다 이뤘다고 생각한다. 원하는 것은 다 했다. 정치인으로서 정치에서 더 소망하거나 아쉬움이 남는 게 하나도 없다. 평범한 사람으로,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


-한국에선 대통령제 시스템을 고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권력구조 개편과 관련해 조언한다면.


“한국 정치에 대해 조언하는 건 외람된다고 생각하지만 경험으로 봤을 때 의회가 더 많은 책임을 갖는 시스템이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의회 속에서 합의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되게, 반드시 합의를 해야만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의회에 들어와 있는 원내 정당들은 누구나 연정의 파트너가 될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국민이 선출하는 강력한 대통령이 존재하되 의회가 더 많은 합의를 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줘서 의회의 합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게 한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베를린=이정민 기자 lee.j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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