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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밥 같이 먹으면 친해지죠 ···‘한끼줍쇼’ 설날에 만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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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능계 대부’ 이경규

어느덧 데뷔 37년차인 개그맨 이경규. 슬럼프를 거의 모르며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그는 이번 설에도 분주한 스케줄을 자랑한다. 권혁재사진전문기자

어느덧 데뷔 37년차인 개그맨 이경규. 슬럼프를 거의 모르며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그는 이번 설에도 분주한 스케줄을 자랑한다. 권혁재사진전문기자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 설날 아침이 밝았다. 온 국민이 맘 고생한 지난 1년, 많은 것들을 흘려보내고 새롭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설 음식을 장만하다 허리를 펴고, 귀경길·귀성길에 올라 한숨을 돌리는 사이 사이 무료함을 달래주고 웃음짓게 하는 TV 프로그램 같은.

그중에서도 방송인 이경규(57)는 시청자들의 가장 오랜 벗 중 하나다. ‘예능계의 대부’이자 요즘말로 ‘갓경규’인 그는 1981년 신유년(辛酉年)에 제1회 MBC 개그콘테스트로 데뷔해 만 36년 동안 8번의 대상을 받으며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전설적인 개인기 ‘눈알 돌리기’부터 누워서 선보이는 ‘눕방’에 이르기까지 슬럼프를 모르고 새로운 도전을 계속해 온 덕분이다.

JTBC ‘한끼줍쇼’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있는 이경규와 강호동(오른쪽). [사진 JTBC]

JTBC ‘한끼줍쇼’에서 처음 호흡을 맞추고 있는 이경규와 강호동(오른쪽). [사진 JTBC]

이번 설 역시 이경규는 ‘열일’할 예정이다. 23년 만에 처음으로 사제지간인 강호동과 호흡을 맞추며 화제를 모으고 있는 JTBC 식큐멘터리 ‘한끼줍쇼’(수 오후 10시50분)에 이어 다음달 3일에는 배우 채정안·건축가 양진석과 함께 신축 버라이어티 ‘내 집이 나타났다’(금 오후 9시)를 시작한다. 여기에 박미선·윤정수 등 후배 개그맨들이 총출동해 우열을 가리는 SBS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 ‘희극지왕’도 모자라 21일(현지시간)에는 미국 LA 판타지 스프링스 리조트 내 이벤트센터에서 ‘응답하라 이경규 쇼’를 개최했다. 녹화 중에도 항상 약을 상비하고 다녀 ‘약방’이라고 놀림받는 대부치고는 상당히 벅찬 행보다.

비결을 물으니 “제가 좀 바지런한 편”이라는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항상 “녹화 없는 날이 가장 행복한 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가 아닌가. “원래 어르신들이 그러잖아요. 늙으면 빨리 죽어야 된다고. 그런데 저는 나이를 먹어서 할 수 있는 분야들이 더 넓어진 것 같아요. 저는 조금도 쉬질 않고 뭐라도 해야 돼요. 술을 먹든지. 병원에도 가야 되고.” 대부다운 대답이다.

서울 홍대 앞 윤형빈소극장으로 찾아간 그날도 회의가 한창이었다. 그는 걸어다니면서도 이야기했고, 또다시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 듯 잠시도 가만있질 못했다. 대기실 전기장판 위에 앉아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반지하방 컵라면 먹고 울컥 ··· 10년간 할 프로 만들고 싶어
| JTBC 식큐멘터리 ‘한끼줍쇼’ 이끄는 이경규

소극장 무대에 걸터앉은 이경규는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 행복하다”며 “내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어디가 아프다, 딸은 결혼했냐 이런 얘기만 하는데 후배들과 어울리다 보면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들을 알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소극장 무대에 걸터앉은 이경규는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후배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어 행복하다”며 “내 또래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어디가 아프다, 딸은 결혼했냐 이런 얘기만 하는데 후배들과 어울리다 보면 내가 생각지 못한 부분들을 알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끼줍쇼’는 산전수전 다 겪은 이경규에게도 낯선 프로그램이다. 강호동이 씨름 선수 은퇴 후 이씨의 추천으로 개그맨으로 전업한 게 1993년이니 두 사람의 방송 경력만 합해도 60년인데, 무작정 모르는 집으로 찾아가 벨을 누르면 “누구세요?” “그런데요?”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더구나 오후 6~8시 안에 한 끼 줄 집을 찾지 못하면 편의점에 가서 인당 2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해야 한다. 그러니 제아무리 ‘코미디언 이경규’이고 ‘천하장사 강호동’이지만 벨 앞에 서면 작아질 수밖에.

“문을 열어주느냐 안 열어주느냐에 따라 정말 천당에서 지옥을 왔다갔다 하는 기분이다. 특히 요즘 같이 추운 때는 열어주는 순간 따뜻한 목욕탕에 들어간 느낌이고, 안 열어주면 계속 돌아다니는 거다. 누군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평소 스타일과 많이 다른 프로그램이다.
“우리가 그동안 같이 안한 이유가 있다. 서로 안 맞는다. 보통 상암동에서 1시에 만나면 9시는 돼야 끝나는데 그렇게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정말 쉴새없이 떠든다. 처음에 호동이는 한번 집에 들어가고 나면 다 비슷비슷할 텐데 어떻게 하냐고 걱정하더라. 그래서 내가 그렇지 않다, 들어가는 집마다 다 사연이 다르다 그랬다. 어떤 집이든 사연 없는 집은 없으니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집이 있다면.
“너무 많다. 청담동에 갔을 땐 정말 다 실패했다. 굉장히 잘 사는 동네인데 아예 문을 안 열어주더라. 그런데 반지하에 사는 친구가 문을 열어줘서 컵라면을 먹었다. 그 친구가 바이올리니스트인데 그 좁은 공간에서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해주는데 정말 울컥했다. 서래마을에 갔을 때도 랜드마크라고 할 정도로 큰 집이라 당연히 안 열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흔쾌히 들어오라고 하셔서 놀랐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은 미숫가루라도 한 잔 대접하라고 하셨다더라. 거기가 가수 신승훈이 예전에 살던 집이라던데 돌아다니다 보면 신기하게 다 연결이 되어있다.”

첫회 망원동을 시작으로 15개 동네를 누비고 다니는 동안 이들은 변화한 한 끼의 의미를 체감했다. 청담동 고급빌라촌에서는 경비원을 통하지 않으면 벨을 누르기조차 힘들었고, 봉천동 원룸촌에서는 모니터와 독대하며 혼자 끼니를 때우는 혼밥족들을 마주했다.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성별·나이·거주형태에 따라 이야기꽃을 피우는 주제도 달라졌다.

원래 식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편인가.

“그럼. 사람들이 만날 때마다 ‘밥 한 번 먹어야지’ 하지 않나. 차라도 한 잔 앞에 있으면 좀 부드러워지고. 처음 본 사람들도 같이 밥을 먹으면 친해지는 것 같다. 우리도 세 식구지만 특별한 일 없으면 안 모인다. 각자 방에 있다가 식사 때가 되야 모인다. 개들도 그렇더라고. 먹을 땐 꼭 모인다. 먹는 게 그래서 중요한 거다.”
노하우는 생겼는지.
“전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타율도 반반이다. 처음엔 내가 굴욕을 많이 당했는데 요즘은 호동이가 많이 당한다. 천하장사가 뭐예요? 조세호씨 아니예요? 하고. 출발할 땐 오늘은 과연 어떤 사람하고 밥을 먹을까 설레다가도 한편으로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나같아도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는 못 줄 것 같은데.”
그래서 후회하나.
“무슨 소리. ‘한끼줍쇼’ 없었으면 작년 하반기에 좀 헤맸을 거다. 중간에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잘됐는데 다시 주춤했다. 호동이도 마찬가지다. 항상 어디를 가도 두목이고, 걔 멘트를 자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한테 잘린다. 예전부터 호동이 위에 누가 있으면 캐릭터에 변화가 올텐데 하는 생각을 했는데 서로 잘된 거지.”
제작자 마인드다.
“나는 처음부터 그랬다. 프로그램 회의하는 것도 너무 재밌고, 아이디어도 많이 내는 편이다.”
올해 예능 트렌드는 뭐라고 생각하나.
“항상 예능의 끝은 다큐라고 생각한다. JTBC ‘뭉쳐야 뜬다’도 중년 남자들의 실제 여행 다큐를 보는 거 아닌가. 우리 프로도 그렇고. 6~7명씩 집단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퍼스널리티로 돌아가 토크쇼를 한다든지 스탠딩 개그 같은 걸 해도 잘 될 것 같다.”
 그래서 스탠딩 개그를 다시 시작한 건가. 지난해 7월 홍대에서 1달간 ‘응답하라 이경규 쇼’를 했는데.
“그렇다. 공연은 버라이어티하게 보여줘야 하니까 꽁트도 하고 개그도 하고 마술도 하지만 나는 내 이야기를 주로 한다. 내가 살아온 얘기. 미국 공연도 큰 틀은 같고. 올해도 또 하고 싶다.”
올해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앞으로 10년 동안 할 수 있는 장기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목표다. 저예산 영화라도 내가 주인공을 한 번 해보고 싶다. 주성치처럼 기존 코미디언 이미지를 가지고 갈지, 기타노 다케시의 야쿠자 영화 같이 전혀 다른 길로 갈지 고민이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다고.
“지금도 그렇다. 2009년 비행기 추락 사고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설리:허드슨강의 기적’을 봤는데 우리 현실과 정반대여서 울림이 컸다. 파일럿이 판단을 잘해서 한 명도 안죽고 다 살았거든. 제일 마지막에 내리고. 이스트우드 감독이 87살인데 60 넘어서부터 좋은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영화도 60부터다. 내가 30년은 어리니까 건강만 잘 유지하면 된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영화가 있나.
“많다. 집 짓는 영화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내 집이 나타났다’를 사전제작 하면서 많이 배웠다. 예전 ‘러브하우스’에서 리모델링을 했다면 이번에는 집을 뜯어서 아예 새로 지어준다. 8개월 동안 6채 짓는 걸 봤으니 큰 도움이 됐다.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 영화화도 잠깐 스톱시켜놓긴 했는데, 어떤 게 제일 먼저 될진 모르겠다. 원래 다 얻어걸리는 거다. 뭐라도 붙잡고 있으면.”
공황장애는 나아졌나.
“좀 괜찮아졌다. 약은 계속 먹고 있지만. 원래 우리 나이 때는 누구나 가슴에 병 한두 개 쯤은 있는 법이다.”
‘내 집이 나타났다’의 이경규와 채정안.

‘내 집이 나타났다’의 이경규와 채정안.

글=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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