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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위탕 “천유런, 남들은 엄두도 못 낼 길을 선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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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28면


동왕(東王) 양슈칭(楊秀淸·양수청)은 태평군의 실질적인 수령이었다. 숯장수 출신이었지만, 대담하고 모략에도 뛰어났다. 부하들에게 엄하고 까다로웠다. 경호원 천꾸이신(陳桂新·진계신)은 직책에 불만이 많았다. 전쟁터에 나가 공을 세우고 싶었다.


양슈칭이 막료들과 우한(武漢) 공격을 준비했다. 이 일대는 양자강 지류가 많은 지역이었다. 교량이 없으면 진입과 주변도시와의 연결이 불가능했다. 한때 목수일을 했던 천꾸이신은 양슈칭에게 참전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양슈칭은 천꾸이신에게 목공 관련 지휘관에 임명했다. 우한은 중국의 배꼽이었다. 자고로 천하에 군림하려면 쟁취해야 하는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였다.


천꾸이신은 태평군의 우한 점령에 공을 세웠다. 부교(浮橋) 건조에 초인적인 능력과 속도를 과시했다. 1만명에서 시작해 50만으로 불어난 태평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다. 2개월 후 고도(古都) 난징(南京)에 입성했다.


양자강 이남을 장악한 태평군은 천국(天國) 수립을 선포했다. 난징도 천경(天京)이라 부르게 했다. 권력은 사람을 부식(腐蝕)시켰다. 종교성이 강한, 살짝 간 사람들이 세운 정권이다 보니 썩는 속도가 빨랐다. 천왕 홍슈촨(洪秀全·홍수전)과 동왕 양슈칭 간의 권력 투쟁이 그치지 않았다. 여자를 놓고 뺏고 뺏기는 추태도 서슴지 않았다. 태평군의 기율도 산만해 졌다.

[천꾸이신, 20살 연하 마리와 결혼]


홍슈촨이 선수를 쳤다. 달 밝은 가을밤, 정예 3000명을 동원해 동왕의 관저를 급습했다. 동왕 일가와 부하들을 몰살시켰다. 기회를 엿보던 청나라 정부는 반격을 서둘렀다. 천꾸이신은 천경 보위전에서 발목에 관통상을 입었다. 상처가 악화되자 제 손으로 발목을 잘라버렸다. 한 쪽 발에 의지해 영국 식민지 홍콩에 잠입했다.


홍콩에는 보석상으로 위장한 태평군 지하조직이 있었다. 귀향을 준비하던 태평군 패잔병들이 몰려들었다. 비밀이 누설되자 홍콩당국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천꾸이신은 아무 배나 올라탔다. 일손이 필요했던 선원들은 천꾸이신을 숨겨줬다. 요리 솜씨에 감탄했다.


천꾸이신은 카리브해를 떠돌았다. 자메이카를 거쳐 마르티니크에 정착했다. 이발사 노릇하며 끼니를 때웠다. 사윗감 구하던 화교 상인의 눈에 들 줄은 상상도 못했다. 약간의 저축과 이발도구가 전 재산인 천꾸이신은 현지인들이 마리라고 부르던 키 크고 예쁜 여자와 부부가 됐다. 나이도 20살이나 어렸다.


마르티니크는 살 곳이 못됐다. 장인의 권유로 트리니다드로 이주했다. 1878년 봄 아들이 태어났다. 유진(尤金·우금)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안 먹고 안 쓰며 모은 돈으로 땅도 구입했다. 망고·사탕수수·고구마·야자수 등 닥치는 대로 농작물을 심었다. 온 가족의 소변을 먹고 열린 감귤은 맛있고 향기로웠다.


천꾸이신은 틈만 나면 유진에게 태평천국의 영웅들에 관한 얘기를 해줬다. “숭고함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던 사람들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열심히 일했다. 풍족을 느끼자, 젊은 시절에 상실한 천국의 꿈을 보상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당이야말로 노예들의 지옥이라는 것을 비로소 알겠다. 서구인들에게 중국은 천당이나 마찬가지다. 일가를 이루면 조국으로 돌아가라.”

[계약과 조정에 능했던 변호사 천유런]
유진이 12살 때 천꾸이신이 세상을 떠났다. 유진은 농장일을 거들며 학업에 열중했다. 20살 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자 혼처가 줄을 이었다. 동갑내기 혼혈아와 결혼했다. 대농장주인 아버지는 프랑스인이고 엄마는 농장의 노예였다. 사생아(私生兒)였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덕에 좋은 교육을 받았다. 마리는 유진의 결혼을 반대했다. “너는 순수한 중국인이다. 게다가 장남이다. 혈통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 이런 말도 했다. “무식한 여자라야 덕(德)이 있다. 온종일 일하고 돌아온 남편에게 온갖 아는 소리 해대며 종알거리면 너만 불행해진다.” 유진은 엄마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유진은 화교와 혼혈아들의 사건을 도맡아 처리했다. 변호사 사무실은 허구한 날 문전성시였다. 25년 후 천유런(陳友仁·진우인)이 혁명정부 외교부장으로 명성을 떨칠 때 베이징 주재 영국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간략히 소개한다.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중국 혁명가. 본명은 유진. 하얼빈에 창궐했던 폐 페스트를 박멸시킨 예방학의 권위자 우롄더(吳連德·오련덕)와 함께 귀국했다. 천유런이라는 이름도 우롄더가 지어줬다고 한다. 변호사 시절, 남편 멱살 끌고 찾아온 여인도 나갈 때는 깔깔거린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계약과 조정에 능숙했다. 고객들에게 사실을 말하기를 요구했고, 그럴 때만 수임했다. 성공한 법관들은 성실한 사기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변호사 천유런은 성실하고 사기성이 없었다. 돈 때문에 법률을 우롱하지도 않았다. 재기 넘치는 학자이며 성공한 변호사이기 전에 정직한 사람이다.”


비서였던 린위탕(林語堂·임어당)은 천유런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결정적인 시기마다, 남들은 감히 엄두도 못 낼 길을 선택했던 사람.” 정확한 표현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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