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삼시집 "사랑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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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몽상으로 가득찬 먼 나라의 그것이 아닌, 이 땅과 진실의 이름으로 부대끼는 그런 사탕을 만나고 싶었다.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우중충한 저녁나절. 무거운 시간의 틈을 비집고『몸채 징소리』같은 사랑의 갈대밭에서 손짓하는 시인의 사랑을 만났다.
사람이 한번 지독하게 사랑한들 그 사랑마다 반드시 끝장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르리. 그러나 시인은 많이 색 바랜 사랑의 이름을 끄집어내 특유의 일상적 호횹을 불어넣고 있다.
시인의 말처럼 가다가 외면하는 줄 알아도 가까이 가고자 하는 욕심을 누가 책할 수 있을 것이며, 열매를 거두기 위하여 0·몇 인가하는 시력으로 잎사귀를 끝까지 주시해야만 하는 사람을 누가 비웃을 것인가.
허황되고 때묻은 우리네 사랑을 향해 시인은 생의 황혼녘에서 깨달은 동찰의 사려를 들려준다.
『지난 날 미지수의 한바다를 향해 횰려보냈던 사랑한다는 말』을 이제야(!) 전지의 교향악을 들으며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자연속에 파묻히는 시인의 마음은 아름답다.
이제 그에게 있어 사랑의 의미는 차라리 자연과 인생에 대한 「성스런 기댐」같은 것이리라.
속절없이 흐르는 구름을 보며 쓸쓸해 하기도 하고, 새파란 싹이 돋길 기다리는 나무의 심정으로 좋은 날들을 기대해 보기도 하는 가난한 시인은 『그래도 세상은 살맛나는 곳』이라고 말한다. 돈이 되지 않는 시를 만지면서….
시인의 내밀하고 장중한 이러한 울립 속에서 우리가 어찌 사랑이란 이름을 사탕하지 않 을수 있으랴. 슬픔은 물론 기쁨마저도 기꺼이 나눌 수 없는 우리들의 사나운 삶에 굵은 빗줄기를 뿌리는 시집 『사랑이여』. <서울삼선동1가·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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