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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병’ 앓는 이들 가슴 아픈 얘기 담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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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돌이켜보면 1990년대야말로 ‘문화의 시대’였다. X세대·신세대 등 각종 세대 담론이 꽃폈고, 서태지로 상징되는 대중문화가 범람했다. 마광수·장정일이 예술표현의 한계에 도전했다면 신경숙·공지영 등은 80년대와 고별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문학판에 새로움을 더했다. 문민정부,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 호황을 배경으로 벌어진 일들이다.

시집 『여기 그대 곁에』 낸 강영희씨
자살 시도 여학생, 가정 깨진 사람…
치유상담 하며 고인 말들 시로 풀어

당시 새롭게 등장한 직업군이 문화평론가다. 대학 교수 같은 뚜렷한 직장이나 학문적 정체성 없이, 문화는 고상해야 한다는 편견으로부터도 자유로워 영혼이 가벼운 이들은 잘 드는 칼 같은 필력과 눈썰미로 거의 모든 사회문화 현상을 도마 위에 올렸다. 기존 문학평론이 금기시했던 영화·드라마·셀레브리티 현상이 단골 놀이터였다.

1세대 문화평론가 강영희. 상처 치유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여기 그대 곁에』를 최근 펴냈다. [사진 우상조 기자]

1세대 문화평론가 강영희. 상처 치유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여기 그대 곁에』를 최근 펴냈다. [사진 우상조 기자]

강영희(57)씨는 그 1세대다. 스스로 “문화 신드롬 전문가였다”고 말하는 강씨는 당시에도 논쟁적 인물이었던 류철균 같은 사람들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다. 방송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2004년 문화교양서 『금빛 기쁨의 기억』 이후 한 동안 뜸했던 강씨가 아담한 시집을 냈다. 얼핏 달달한 사랑시나 종교적 순명(順命)을 노래한 구도시집처럼 보이는 『여기 그대 곁에』(도어스)다. ‘텅 빈 바구니’ 같은 명상적인 느낌의 12개 소제목 아래 우화적인 짧은 시들을 모으고, 각각 영어 번역도 덧붙였다.

강씨는 “밋밋해 보이겠지만 가슴 아픈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쓴 작품들”이라고 했다. 그는 “2010년부터 쉽게 말해 힐링센터, 실제로는 공감을 통한 치유 공간을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서울 사직로의 ‘구문자답(九問自答)’이라는 곳이다. “반복된 자살 기도로 손목이 지퍼처럼 돼버린 여학생, 경제적·가정적으로 깨진 사람들, 성폭행 상처를 품은 여성 등 제도권 의료·치유기관이 치료 불가능한 사람들이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2010년 문 열어 지금까지 5000명을 상담했다”고 밝혔다.

딱한 사람과 가슴 먹먹한 상담을 하고 나면 그 다음날 말이 고인다. 그걸 받아쓴 게 시집에 실린 시라고 했다. 산뜻해 보여도 실은 피눈물 나는 고통이 깔려있다는 얘기다.

논리와 비판정신을 내세우던 사람이 힐링센터라니. 80년대 이념, 90년대 문화, 그 후 이어진 웰빙·힐링의 대세를 좇은 재빠른 변신인 걸까.

강씨는 “커다란 구렁이를 피를 튀겨가며 반토막 내 죽이는 꿈을 꾸고 나서 구문자답을 차렸다”고 했다. 그렇기 되기까지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개인사가 있었다. 어쨌든 강씨는 꿈에서 깨어난 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특히 그 사람의 무의식까지 내려가 고통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했다. 무의식 리딩(reading) 능력이다. 강씨가 읽어 혹은 위로해, 무의식의 혈로가 뚫린 사람들은 더 이상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다. 단 맥을 집듯 무의식 속 상처를 정확히 읽어줘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강씨의 주장이다.

강씨는 “시집 출간은 외연의 확대”라고 했다. “소셜 메시징”이라고 했다. 자신의 귀한 것을 널리 퍼뜨리겠다는 얘기다. 이런 시집을 통한 위로가 필요할 만큼 한국 사회는 고통과 아픔이 많은 곳이어서다.

글=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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