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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심만 오롯이 세워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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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18면

사실과 이야기, 생각과 주장을 담을 수 있는 매체는 계속 늘어나고 있다. 종이 위에 그것들을 담아 온 전통적인 출판사들 중에서도 소리나 영상을 함께 담을 수 있는 매체들에 관심을 가지는 곳들이 늘고 있다. 담길 내용을 생산하는 것은 출판사들이 늘 하는 일이지만, 종이 이외의 매체를 다루는 것은 익숙하지 않다. 그래도, 책의 내용을 담는 다른 그릇으로, 혹은 책을 시장에 알리기 위해 독자에게 다가가는 수단으로 열심히 뉴미디어를 익히고 있다. 출판사 중에는 디지털 미디어를 다루는 자회사를 설립해서 적극적으로 이 방향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 자회사 관계자들이 새로 시작하는 사업에 참여를 권유하러 찾아왔다. 이들이 내세운 자신들의 강점은 IT 쪽에서 출발한 다른 회사들과는 달리 출판을 잘 이해하고 있고 출판계의 공적인 이해를 대변하면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회사의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출판계의, 혹은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할까? 회사가 어려워도 공심, 그러니까 모두의 이익을 위하는 마음이 변치 않겠느냐고 물었다. 분명한 답을 듣지 못했다.


2000여개 출판사가 700억원 정도 피해를 입은 송인서적의 부도를 수습하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송인서적은 1990년대 후반에 부도를 낸 적이 있지만 모두의 노력으로 회생한, 반세기를 끌어 온 대형 도매상이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거래처도 많고 뿌리도 깊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같은 대형 서점이나 대형 온라인 서점들은 많은 출판사들과 직접 거래하면서 개별적으로 계약을 하고 책을 공급받지만 구석구석에 있는 작은 서점들은 도매상을 통하지 않고 책을 구할 방법이 없다. 서점의 입장에서 책을 공급받는 가격만 생각하면 직접 출판사와 거래하는 것이 낫지만 출판사들과 거래를 트고 대금을 지급하는 절차가 복잡해서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도 상당하다.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전에 수많은 출판사들과 직접 거래를 하는 건 불가능하다. 출판사의 입장에서도 서점과 직접 거래를 하는 것이 공급가를 좀 더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많은 서점에 책을 보내는 일이 수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금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복잡한 절차를 송인서적에 모두 맡긴 단일화 출판사가 500여 개나 된다.


도매상은 방방곡곡에 책을 공급하는 모세혈관 같은 기관이다. 모세혈관이 막히면 끝부터 썩는다. 서점 하나 없는 도시는 문화의 불모지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도서정가제에 힘입어 하나 둘씩 생겨나고 있는 지역의 서점들은 독특한 문화 공간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작가들이 독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커뮤니티를 만들어서 독창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름답고 독특한 동네 서점은 일하는 곳과 사는 곳이 분리된 도시 생활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생활의 중심이다. 그런데 이들은 도매상 없이는 책을 수혈받을 길이 막막하다. 이런 중요한 공간들이 모두 사라지면 독서 문화도 시들해지고 출판도 함께 사양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도매상이 필요하다는 것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일이지만 도매상이 장사가 되는가는 다른 문제다. 송인서적의 부도에는 방만한 운영이나 경영의 실패 이외에도 많은 요인들이 겹쳐 있을 것이다. 부채의 부담을 미래로 전가하는, 어음으로 거래한 것이 피해의 규모를 키웠다. 하지만 도매상이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면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대형 서점들이 지점들을 급속히 늘리고, 무료 배송과 빠른 배송을 무기로 삼는 온라인 서점의 위력이 점점 커지면서 도매상은 이윤이 별로 없는 작은 서점들만 상대하면서 남는 것이 별로 없는 장사를 했을 것이 뻔하다. 그나마 있던 납품 시장도 지방자치단체들의 지역 우대로 중앙의 도매상들은 지역 서점들이 따낸 납품을 덤핑 입찰로 따내야 했다고 한다. 입찰을 따면 거래 규모는 커지지만 적자 폭은 더 늘어나는 악순환.


도매상은 필요하지만 장사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속은 알 수 없으나 아직 건재한 도매상들이 있으니 이들이 건전한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정가제가 확립되고 납품 시장의 혼탁함이 사라지면 경쟁을 통해, 시장을 통해 서점과 출판사가 거래를 할 수 있는 적당한 가격이 만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송인서적이 무너지고 독점적인 도매상이 출현하면 서점과 출판사들 모두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하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공적인 유통기구를 만드는 것이다. 이 기구는 책 생태계에서 모세혈관이라는 공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목표다. 운영을 위한 비용은 벌어도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출판계는 이미 책과 전자책의 유통과 관련해서 공적인 임무를 가진 회사를 여럿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공적인 기능과 회사의 이윤 사이에 끼어 실패했거나 의미가 없어졌다. 사익이 공심을 앞서 나라 전체가 파국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공심만을 오롯이 세우고 갈 기구의 설립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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