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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史筆)과 문필(文筆)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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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호 30면

1982년 여름이니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의 일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갓 진학한 신출내기 문학 연구자였던 필자는 학교 잡지의 원고 청탁 일로 광화문 한 호텔 커피숍에서 작가 이병주 선생을 만났다. 선생은 그 무렵 한국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였고, 그곳은 선생이 매일 오후 사람을 만나는 자리였다.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92년 서울에서 유명을 달리했으니 그때 선생의 연륜은 갑년을 넘겼고 작가로 활동한지 20년, 생애의 연한을 10년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 마주 앉기도 어려운 대작가에게 햇병아리 비평가 지망생이었던 필자는 매우 무모하고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역사란 무엇입니까?”


역사란 무엇이냐라니! 돌이켜 생각해 볼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도대체 그 따위 대책 없는 선문답류의 질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문학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 특히 역사소설의 그것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끌어안고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의 작가를 만난 필자로서는 꼭 내놓아야 할 말의 꼬투리였다. “역사란 믿을 수 없는 것일세.” 선생의 답변은 너무 짧았고, 그 또한 선문답적인 것이었다. 역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라니! 당시는 운동개념으로서의 문학이 한 시대를 풍미하여 민족?조국?역사 등의 언사가 그 이름만으로도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이었다.


선생의 어조가 단호하고 표현이 명료하여 거기에다 감히 추가의 질문을 덧붙일 수 없었다. 신통찮은 문학공부 몇 년을 더하여 박사과정에 다닐 즈음에야 왜 선생이 그렇게 말했으며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를 깨우칠 수 있었다. 선생에게 있어 기록된 사실로서의 역사는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실체를 정면에서 파악하는 데 그칠 뿐, 그 정론성의 성긴 그물망으로 포획할 수 없는 가치와 진실에 대해서는 무방비의 기술 형식이었던 것이다.


예컨대 6?25 전쟁이 남긴 재산과 인명의 피해가 얼마인가를 기록하는 것은 역사의 영역이지만, 그 전란 중에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아플 것인가를 기록하는 것은 문학의 영역이다. 이병주 선생은 제1공화국 시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소설 ?산하?의 에피그램으로 다음과 같은 선언적이며 고색창연한 수사를 썼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 절창의 문장 한 줄은 하동 섬진강변에 있는 그의 문학비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그의 어록에 있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도 매한가지의 뜻이다. 실체적 삶의 집적으로서 ‘역사’와 그 배면에 잠복한 ‘문학’의 존재양식, 그렇게 서로 다른 두 글쓰기의 지위에 대한 인식을 붙들고 선생은 30년 세월에 80여 권의 소설을 남겼다. 바탕을 두는 좌표가 다른 만큼 역사와 문학은 삶의 의미를 재는 잣대가 서로 다르다. 지금의 시대적 상황을 평가할 후세의 사필(史筆), 그 내면 풍경을 형상화할 후세의 문필(文筆) 또한 서로 다른 기준과 결과를 산출할 것이다. 이 두 맥류 가운데 어느 한 편이 더 무겁다고 할 수는 없다. 역사가 외형적?결과론적 측면을 앞세운다면, 문학은 내포적·선험적 인식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국정 농단’ 사태는 후세의 사필과 문필에 의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사필은 그야말로 공명정대하게 ‘사실’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야만 후대의 경계요 교훈으로서 보람을 가질 수 있다.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라는 명언은, 그 역사가 온전히 올곧게 기록되었을 때를 전제로 한다. 우리 역사 속의 사관들은 그 공정한 기록에 목숨을 걸었다. 사회의 공기(公器)요 기록자인 언론이 정론직필에 명운을 걸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비판 대상자의 잘못을 드러내더라도 객관적 상황을 통찰하고 사실 관계에 기반을 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시민 사회의 감성적 주장을 뒷북치듯 따라가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필자가 보다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대목은 이 사태를 문학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이야기로 풀어낼 것인가에 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주제로 한 소설 가운데 수발한 작품으로 꼽히는 것이 여러 편 있다. 현장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다룬 홍희담의 ?깃발?을 시작으로, 그 참상을 겪은 소녀의 떠돌이 정황을 묘사한 최윤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와 같은 단편이 있다. 10년의 인고를 거쳐 다섯 권의 장편소설로 증언자의 소임을 다한 임철우의 ?봄날?이 있는가 하면, 2014년에 새롭게 이 비극을 부각시킨 한강의 장편 ?소년이 온다?가 있다.


국정 농단 사태도 마침내 이와 같은 문필의 조명 아래 서게 될 터이다. 역사의 눈으로 포착하지 못한 개인의 정황과 그 주변 인물들의 형편을 훨씬 더 선명하게 그려내는 날이 올 것이다. 국민 가운데 어느 한 사람, 심지어 가해자에 해당하는 어느 한 사람이 이야기의 문면 위로 부상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어느 개인의 고통과 한계상황에 대한 이해와 연민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의 잣대가 숱한 가지치기를 마친 연후에 가능한 형국이다. 가해자는 스스로 문학의 잣대를 운용할 수 없다. 양보와 관용은 피해자의 것이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다. 그 내면의 소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우리 모두 성급한 예단으로 목말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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