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고마운 친구 지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14호 34면

오늘은 제 친구들을 소개할까 합니다. 그냥 친구라고 하면 아마 그들이 섭섭해 할 것 같네요. 그러니까 이 두 친구는 요즘 말로 하자면 저의 ‘절친’이고 ‘베프’죠.


대개 어릴 때 사귄 친구가 스스럼없고 막역하잖아요. 그런데 제 친구들은 성인이 되고 난 후에 사귄 벗이랍니다. 한 친구는 30대에, 다른 한 친구는 40대 후반에 사귀었으니까요. 그래도 어찌나 허물없이 구는지 아무 때고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저와 아내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새벽에도 오지요. 와서는 저한테 딱 붙어 떨어질 줄을 몰라요. 물론 저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아내가 곁에 있으니 아무래도 신경 쓰이고 눈치가 보이지요. 또 그렇다고 제가 표나게 아내 눈치를 보면 친구 녀석들이 무안해 할 것 같아 그것도 조심스럽고요.


20년 전쯤이었을까요. 동네 산을 오르다 숨이 콱 막혔습니다. 숨구멍이 바늘구멍만큼 작아졌어요. 아무리 심호흡을 하려 해도 숨만 가쁘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았어요. 눈 앞이 노래졌죠. 그러다 컴컴해지는 느낌. 얼마 동안을 그렇게 개처럼 헐떡대며 늘어져 앉아있었던 것 같아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아, 이 공기,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숨이 쉬어질 때까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산 중턱에서 그 친구를 처음 만난 셈이죠.


그리고는 금세 잊어 버렸어요. 생활하는 데 별 불편함을 몰랐기 때문에 병원에 가봐야 한다는 생각도 못했죠. ‘아주 드물게’가 ‘가끔’이 되고 다시 ‘자주’가 될 때까지도 저는 숨가쁨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제가 그 친구를 제 생애에 받아들인 것은 어느 날 밤이었어요. 호흡곤란이 심해져 마치 100미터를 전력으로 질주한 후 한 손으로 코를 막고 오직 입에 문 좁고 긴 스트로우를 통해 가쁜 숨을 쉬어야 하는 것처럼 호흡을 했던 밤, 친구는 문신처럼 제 몸에 새겨졌죠.


그 후 저는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고 치료도 받고 약을 복용하고 기관지 확장제 흡입기를 사용합니다. 요즘은 그 친구도 다른 일로 바쁜지 저를 찾아오는 횟수가 예전에 비하면 꽤 줄어든 것 같습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그 친구가 그리워지네요.


또 한 친구는 사귄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이었으니까요. 회식하고 늦게 집에 돌아오다가 오른쪽 발을 삐끗했어요. 발목을 다친 거라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났더니 글쎄 오른쪽 엄지발가락이 퉁퉁 부어있는 거에요. 발가락이 부러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원래 엄살이 심하긴 하지만 어찌나 아픈지 바람만 닿아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왔어요. 발 뒤꿈치로 조심조심 걸어 겨우 병원에 갔더니 골절이 아니라 통풍이라는 겁니다.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친구가 제 어깨를 쳤죠. “반갑다, 친구야.”


그렇습니다. 이미 아셨겠지만 두 친구는 저의 지병인 천식과 통풍입니다.


원래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 말이 정말 맞아요. 이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 속에 제가 고스란히 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과식하고 운동을 싫어하고 술을 즐겨 마시고 지방 섭취를 많이 하고 육류와 어패류를 좋아하는 사람이 저랍니다. 의사가 추천하는 생활습관이나 식이요법과 정반대로 먹고 마시고 생활했던 거죠. 그러니까 두 친구를 제가 부른 거죠. 제가 먼저 친구신청을 하고 강제하다시피 제 몸속으로 초대한 거죠.


저는 이제 그들 때문에 산 오르는 것도 힘들고 힘껏 달리지도 못하고 좋아하는 술도 마음껏 마실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면 참 고마운 친구들입니다. 아무 때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그 녀석들 덕분에 어쨌든 술도 줄이고 식사도 조절하고 제 몸을 자주 돌아보고 있으니까요. 아마 그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도 방종하고 방탕하게 인생을 탕진하며 살고 있을 테니까요.


고려 때 사람 이조년이 쓴 시조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지요. “다정도 병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저는 병이 다정합니다. 그 동안 정이 많이 들어 한동안 저의 지병인 두 친구가 안보이면 서운하고 걱정될 지경입니다. 그러니까 가끔은 멍게와 꼬막과 홍합탕에 소주 한 잔 하면서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요. 아주 가끔은 말이죠. ●


김상득

Copyright by JoongAng Ilbo Co., Ltd. All Rights Reserved. RSS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