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 파견·하도급 비정규 근로자 하는 일, 3월부터 공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전자제품을 만드는 대기업 A사는 지난해 근로자의 20%인 5000명 정도가 ‘소속 외 근로자’라고 밝혔다. 파견이나 도급업체 정규직이지만 자신의 회사가 아니라 A사에서 근무하는 근로자다. 정부가 2년 전부터 시행 중인 고용형태공시제에 따라 매년 공개하고 있다. 다만 이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현행 규정상 소속 외 근로자의 숫자만 공표하도록 돼 있기 때문이다.

고용형태공시제 개정 예고
2년 이상 같은 업무 여부 파악
인력 운용 현황 세세히 밝혀야
재계 “정규직 전환 압박” 반발
노동계 “기업 편법 없앨 계기”

올해부터는 달라진다. 파견이나 하도급업체 근로자가 맡고 있는 직종과 업무까지 공표해야 한다. 고용노동부는 이런 내용으로 고용형태공시제 시행규칙 개정안을 조만간 입법예고하고 3월부터 시행할 방침이다. A사의 하도급 인력은 장치산업의 특성상 외국산이나 특수설비를 관리 또는 보존하는 업무를 맡은 장비업체 소속 근로자가 많다. 따라서 올해부터는 ‘OO장비 담당 정비공 OO명, 운용 OO명 ’ 등의 방식으로 공표해야 한다. 사실상 어떤 장비를 쓰는지, 관리에 얼마나 투입되는지가 낱낱이 공개된다. 이 회사 관계자는 “제품의 특성상 장비 관리 인원만 봐도 어떤 형태로 공정이 이뤄지는지 추정이 가능하다”며 인력 운용 전략의 노출을 우려했다. 회사는 하도급과 파견인력의 직접고용(정규직화)에 대한 여론 압박도 거세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지난해 4월 고용부는 ‘상시고용업무에 비정규직 사용 금지’ 행정지침을 냈다. 고용부는 이 지침에서 상시업무를 ‘2년 동안 업무가 이어지고, 앞으로 2년 동안 계속 필요한 업무’로 규정했다. 이런 업무에는 비정규직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공공부문에선 2007년부터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있다.

고용형태공시제 시행규칙 개정안은 파견이나 하도급업체 근로자가 파견된 기업에서 어떤 업무를 하는지 공개해 상시업무를 하는 경우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광호 한국경영자총협회 고용정책팀장은 “정부의 행정지침과 고용형태공시제가 맞물려 기업에 대한 정규직화 압박이 거세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5월 대한상공회의소가 회장단과 기업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가장 부담되는 것으로 상시업무 정규직 전환(37.3%)을 꼽았다. 정부는 또 현재 법인 단위로 공개하던 고용 형태를 개별 사업장 단위로 범위를 좁히기로 했다. 예컨대 B병원의 경우 지난해까지는 별도로 기간제나 하도급 근로자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 병원은 공익재단인 사회복지법인의 일개 사업장으로 분류돼 있어서다. 공익재단 전체 소속 외 근로자에 포함시켜 공표하면 됐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전국의 병원별로 비정규직이 얼마나 일하고 있는지 공개해야 한다.

정부는 이런 조치를 취하는 이유로 ‘자율적인 고용 구조 개선을 유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론 압박을 통한 비정규직 규모 축소를 노리겠다는 얘기다. 고용형태공시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 시행 중인 제도다. 경영계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김영배 경총 부회장은 “정부 구상대로 시행하면 인력 운용의 탄력성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며 “특히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하는 세계 각국의 흐름과 정반대 조치”라고 말했다.

주요 선진국에서는 하도급업체를 활용하되 대기업과 공동 생산·기술개발을 통해 하도급업체를 강소기업으로 키우는 전략으로 방향을 틀었다. 독일은 대기업이 신기술을 활용한 생산 공정을 플랫폼화하고 중소기업을 생산 공정에 참여시킨다. 이를 통해 전문화된 강소기업을 육성한다는 ‘인더스트리 4.0’을 시행 중이다. 프랑스 MIDEST에 따르면 2007년 현재 유럽연합(EU) 15개 주요국의 중소기업 가운데 사내 하도급업체는 27만 개에 달한다. 여기서 발생한 매출액은 168조원이었다. 실제로 BMW라이프치히 공장은 전체 인력의 57%가 사내도급이거나 파견직이다. 일본 조선업계도 67.2%가 사내도급이다. 유니클로는 해외 매장 전체를 사내도급업체로만 운영한다.

노동계는 반기고 있다. 이정식 한국노총 사무처장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기업의 편법 인력 운용을 낱낱이 밝힐 수 있게 됐다”며 “이젠 기업 스스로 상시업무에는 정규직을 고용하는 풍토로 바꿔 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간제 근로자=회사가 근무기간을 정하고 직접 채용한 근로자.

파견근로자=파견회사에 소속된 근로자. 파견회사와 인력 공급 계약을 맺은 회사에 파견돼 일한다.

사내하도급 근로자=하청회사의 정규직 근로자로 도급계약을 맺은 원청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자.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