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의 문민화바람-5 장두성 특파원 그 현장을 가다|아사상태의 경제회복이 관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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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라틴 아메리카 네나라를 여행하면서 받은 가장 강렬한 인상은 극심한 빈부의 격차였다. 리마·산티아고·멕시코시등 각국의 수도 변두리에는 거적때기만 걸쳐놓은 판자촌들이 고층건물의 숲을 이루고 있는 중심가를 포위하듯 펼쳐져 있었다.
판자촌과는 대조적으로 부유층들은 거대한 정원에 수영장까지 갖춘 서구식 저택에 살면서 마치 점령지의 군영처럼 밀폐된 담벼락을 쌓아놓고 있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9백달러에도 미달하는 피루에서는 부유층이 사는 저택과 아파트에 하녀와 운전사의 출입전용문과 엘리베이터를 따로 만들어 주인 식구가 쓰는 통영문에는 얼씬도 못하게 해놓고 있다. 이들의 한달 급료는 4만원 정도였다.
정부청사가 모여선 멕시코시의 「헌법광장」에는 일자리를 잃은 전공·연관공들이 하루 종일 일거리를 기다리며 앉아 있다. 최저임금이 하루 2천원 정도로 책정되어있 는 이 나라에서 닭고기 1kg을 사려면 이들이 4시간45분을 일해야된다고 한 연구보고서가 지적하고 있다.
산티아고시의 칠레대학부근 담벼락에는 『공부를 하려면 먹어야지』라는 처절한 낙서가 정치의 문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구호들 사이에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남미에서 해방신학과 같은 급진적 혁명이론이 나온 것은 이와 같은 빈부격차의 구조적 고착이 불러일으키는 절망감에 기인한다.
정치의 문민화는 물론 시민들의 정치의식과 함께 정치주역들의 결단력있는 행동에서 그 추진력을 얻는 것이지만 폭력혁명 아닌 사회개혁을 전제로 한 문민화는 국민경제의 전반적 향상을 바탕으로 할때만 그 진로가 확실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로 보면 남미의 쿠데타는 극빈층의 불만을 타고 좌파 혁명가들이 체제에 도전을 강화할 때 질서회복을 구실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남미의 문민화는 아직도 험난한 고비들을 앞에 두고 있다. 남미 나라들은 페루와 브라질의 단편적인 예외를 빼고는 대부분 4년째 마이너스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다. 석유값의 하락과 수출의 주종을 이루고 있는 1차상품값이 계속 내림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중남미국가들이 다같이 걸머지고 있는 엄청난 외채가 극복하기 어려운 멍에가 되고 있다. 전 세계 총외채 8천억 달러 중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진 빚은 40%를 능가하는 3천6백억 달러다. 또 세계 3대 외채국들이 모두 이 대륙에 있다.
이들 나라들은 마이너스 성장을 겪고 있으면서도 연간 3백억 달러의 외채이자를 물고 있고 상환조건을 완화하는 댓가로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한 서방 은행으로부터 엄격한 긴축정책을 강요받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외채의 대부분이 과거 군사정권 때 진것인데 이를 갚는 고통은 문민정권이 당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민간정부들은 서방금융기관들이 요구하는 긴축정책이 경제를 위축시켜 결과적으로 문민체제의 기반을 위협했다고 항의하지만 채권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하고있다.
그와 같은 난국속에서 페루의 「가르시아」대통령이 수출총액의 10%만 외채상환에 쓰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의 선언은 지금까지 채권자가 빚 받는 조건을 일방적으로 제시해온 역관계를 뒤집어 채무국이 채무이행 시간표를 제시한 것이며 외채문제를 정치문제로 변환시킨 것이다.
그의 선언은 즉각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고 빈국과 부국간의 경제관계를 지금보다 공평한 것으로 바꾸자는 주장을 해온 제3세계에서 영웅으로 추앙되었다.
그러자 서방 금융기관들은 페루에 대한 돈줄을 끊기 시작했다. 페루가 지난해 8월 「가르시아」선언에 따라 IMF에 줄 연체이자 1억9천3백만 달러 중 3천5백만달러만 갚자 IMF는 페루에 대한 신규차관 거절로 맞섰다. 페루는 가이아나·리베리아·수단 및 베트남에 이어 세계 다섯번째로 국제금융계의 고아가 되었다.
외채선언이 있던 첫해 신규 장기차관계약은 85%나 줄어들었고 86년3월 15억 달러에 달했던 외환보유고는 금년1·4분기에는 8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밀어닥친 외환고갈의 압박앞에서 페루의 경제관리들은 남은 외화보유고로도 앞으로 7개월간 수입을 할 수 있으며 그동안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늘리면 국제금융계의 압력도 줄어들 것이라고 애써 낙관하고 있었다.
페루가 택한 용기 있는 결단은 그러나 남미의 외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길을 제시하지는 못한게 분명하다. 페루보다 훨씬 더 많은 외채를 지고있는 멕시코·브라질·아르헨티나등이 페루와 공동보조를 취하지 않고 있는 걸 보면 그렇다.
리마에서 만난 한 원로 언론인은 「가르시아」대통령이 다른 외채대국들에게 『톤토 우틸』(쓸모있는 바보)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혹평했다.「가르시아」선언이 국제금융계로부터 어느 정도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관망할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척후병으로 페루가 나서는 것을 외채대국들이 뒤에 앉아 지켜보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페루와 아르헨티나 등 문민화를 이룬 나라들은 군사정권 때 불려 놓은 국방비를 크게 삭감하고 병력수도 줄이고 군인봉급도 내렸다. 아르헨티나는 국방비를 50%나 삭감했고 페루는 공군이 사들이기로 계약한 미라지 전투기 수를 25대에서 12대로 줄이고 2억4천만 달러짜리 기함수리계약을 폐기했다.
그와 같은 조치는 낭비로 간주된 군비를 민간경제부문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지만 스스로 권력을 내어놓고 물러난 군부에서는 이를 보복으로 보고 불만이 대단하다.
이와 같은 민-군간의 반목이 무리 없이 해결되어야 문민화 과정은 순조롭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외채문제에 서방금융기관이 선의의 조력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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