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일수록 자제와 인내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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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전환기의 의미가 너무나 실감나는 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6·29 민주화선언의 충격이 서서히 가시면서 바야흐로 우리 사회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문제들이 두꺼운 땅껍질을 뚫고 여기 저기서 머리를 들고 있다.
태백에서는 광원 6백여명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이 벌어지고, 대구의 법정에서 방청객들이 피고인을 잡고 농성을 벌이는가 하면, 거창에선 태풍피해주민들이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를 막고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연좌농성을 벌이는 사태가 발생했다.
또 서울 가락시장에서, 축협공판장에서도 집단 농성과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의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의 시비는 지금 단계에서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같은 시위와 농성과 파업사태는 분명히 이 시대의 고통을 실감하게 하는 한 단면이란 것을 냉철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들 시위들은 대체로 지금 갑작스레 만들어진 불만과 문제를 토로하는 것이 아니며 오랜 기간 억압적 체제 속에서 부자연하게 눌리고 감춰졌던 문제들이 분출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진작에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도사리고있는 문제들을 그때그때 타협을 통해 순리적으로 풀어왔던들 생겨나지 않았을 문제들이다.
또 상호존중과 호혜평등의 원칙에 따라 대화와 절충으로 무리없이 문제를 해결하는 민주적 관행이 형성되었었던들 생겨나지도 않았을 일들이다.
그 점에서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억지와 무리로 세상일을 처리해 왔었던가를 반성도 해야한다.
하지만 그같은 과거의 오류와 과오는 지금 개선을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민주화의 진전과 더불어 반드시 확실하게 고쳐지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있다.
그런 누적된 문제들과 불만들을 해소하자고 온 국민의 열화 같은 합의아래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바로 그같은 중대한 시점이다.
모든 국민이 너나없이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대망의 민주화시대를 위해 나아가고 있는 때다.
민주화는 너무도 큰 희생과 고통의 댓가이기 때문에 온국민이 마음을 합쳐 기도하는 심정으로 소중히 다루어야할 과업이다.
그것이 어느 개인이나 집단의 소리와 아집 때문에 훼손하거나 방해하는 일은 결코 용서될 수 없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집단민원이 결코 작은 문제라거나 그릇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민주화 과업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성급하게 자기의 권리와 이익을 주장하기 보다 대의와 대리를 위해 인내와 자제로 잠깐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혹시 그같은 집단행동들이 자제를 잃을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커녕 민주화의 성취에 차질을 주는 불행한 구실을 가져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두가 투철한 책임의식으로 우리의 민족적 민주화 과업을 이룩하는데 영예롭게 동참하였다는 긍지를 나누어 갖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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