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서<논설위원>|같은 실패 반복하면 비문화국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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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금은 대변혁이 진행되는 전환기다. 방향은 합의돼 있지만 결과는 예측하기 어렴다. 낙관론은 지금 논의중인 정치일정대로 개헌과 선거가 치러져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룩될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비관론도 만만찮다. 이들은 61년과 80년에 겪은 「5월의 좌절」이 반복되지 않을까 우려한다.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국가관리 방식이 요구된다. 그것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어서는 안된다. 「아래로부터의 혁명」도 적절치 못하다. 그 중간형태인 안협혁명이어야 한다.
「위로부터의 혁명」의 주체는 지배세력이다. 평화적이고 희생이 적지만 구체제가 지속되고 개혁이 철저하지 못해 혁명적 민중의 불만은 그대로 남는다. 갑오경장이나 일본의 명치유신, 대만의 자유화가 이에 속한다. 군주가 하사하는 흠정헌법도 그 산물이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민중혁명이다. 신속하고 철저하지만 유혈과 파괴가 따른다. 동학혁명이나 프랑스대혁명, 필리핀 민주화가 이에 속한다. 「6·29선언」이후에도 정권타도를 외친 그룹은 이 혁명의 주창자들이다.
안협혁명은 지배세력이 구체제를 유지하면서 민중의 압력과 요구를 받아들여 추진한다. 시간은 걸리지만 희생이 적고 민의가 반영되는 장점이 있다. 민권과 관권이 균형될때 이뤄지는 혁명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처렴 평화혁명의 모습을 지닌다.
우리가 「6·29선언」을 받아들인것은 안협혁명방식을 선택했다는 의미다. 국민들은 급하고 중요한 것부터 순서를 정해서 충격과 차질을 극소화하는 「점진온건론」에 합의한 것이다. 그러나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회 일각엔 정치뿐만 아니라 사회 전분야에 걸쳐 신속히 변혁시켜 나가야 한다는 「급진과격론」이 있다. 아직은 온건론이 우세한 편이지만 두 이견의 갈등은 더욱 심해질 전망이다.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단계별목표를 구체화·단순화시킬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 가는데는 자유화·민정화·민주화의 3단계가 있다.
지금은 첫 단계인 자유화단계다. 개헌을 포함한 일련의 재입법과정이 끝날 때까지가 이 단계에 속한다. 선거이후 민간정부가 들어설때까지는 민정화단계, 그 다음부터가 민주화단계다.
자유화단계의 목표는 정치혁명에 국한시키고 「정치체제의 민주화」를 기본과제로 삼아야 한다. 이것은 유신이후 상실·왜곡된 자유민주주의정치제도들을 복원하는 재민주화작업이다. 여기엔 선결조건이 따른다. 민주정치의 필수 진제인 정치활동의 자유화, 인권보장, 언론자유의 회복등이다. 그 일부는 실현됐으나 전반적으로는 미흡하다. 그밖에도 권위주의 하에서 위축된 민권분야는 원상복구돼야 한다.
목표가 복잡 산만하면 실패 가능성만 높아진다. 본격적인 사회개혁은 7개월뒤 다가올 제3단계에 들어가 시작해도 된다. 수십년을 견뎌온 우리가 수개월을 못참아 낭패하는 우는 없어야 한다.
민주화는 지금 시대정신이다. 거대한 조류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토대는 아직 약하다. 흐름이 완만하면 감당할수 있지만 폭류화하면 둑이 터지고만다. 무절제한 집단시위나 한풀이는 폭류화의 기폭제가 되기 쉽다.
과거엔 관이 「법」과 「질서」를 외쳤지만 지금은 민이 그래야 할때다. 학생들이 분신· 투옥· 최루의 고난을 감수하며 얻어낸 이 기회를 놓친다면 그 희생을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지금 머리띠를 두르고 곳곳에 나와 있는 민원부대와 이익단체들의 집단시위는 자제돼야한다.
타협혁명으로 탈권위주의에 성공한 나라들의 경험은 좋은 교훈이다. 그 하나가 신·구세력의 공존과 타협이다. 주동적이고 악랄했던 극소수의 반국민사범들은 단죄됐지만 대부분은 신세대에 대한 견제 내지 경쟁 세력으로 남아 있다. 중요문제들이 국민적 동의를 토대로 결정되고 개혁은 점진적이지만 철저했던 점도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바로 타협혁명의 원칙이자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받는 리더십이다. 스페인의 「카를로스」왕, 그리스의 「카라만리스」 수상, 아르헨티나의 「알폰신」 대통령이 그 예다. 이들은 민주개혁에 대한 불굴의 신념과 용기를 가졌다. 온건하면서도 단호하고 권욕을 초월한 애국심의 소유자들이다. 동원된 민자를 빙자한 이승만의 불출마 번의, 민정복귀를 거부한 박정희화 거듭된 번의 이래 우리 정치인들에게 익숙해진 권력 지향의 번의 습성을 거기서는 찾아볼수 없다.
정치혁명이 성공의 기미를 보이면 신세력은 분열된다. 그러나 반동세력은 단결하여 반격을 시도하는 것이 역사의 통례다. 우리 「5월의 좌절」들은 민주화를 위한 단계별 목표 설정 없이 집단행동이 범람하고 민주세력이 분열된데 있다. 그런 수치스런 표류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
같은 실패를 반복한다면 결코 문화국민이 아니다. 한핏줄끼리 모여사는 이 땅이 극한투쟁의 제로섬사회여서는 안된다. 이 민족공동체를 아름다운 민주의 나라로 꾸며 온겨레가 함께 사는 복된 터전으로 가꿔나가야 한다. 지금은 이를 위해 우리 모두가 비강한 결의를 다시한번 다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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