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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에서 싸우는 가족, 뭔가 감추는 정치인…세상을 들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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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장영혜중공업의 신작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가 설치된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한 쌍의 스크린에 각각 한글과 영문으로 문자 텍스트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사진 김상태]

장영혜중공업의 신작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가 설치된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 전시장. 한 쌍의 스크린에 각각 한글과 영문으로 문자 텍스트가 등장하는 작품이다. [사진 김상태]

넓직한 전시실마다 달랑 한 편씩의 작품이 관객을 맞는다. 각 작품은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대형 스크린이나 벽면에 펼쳐진다. 내용은 명징하고 강렬하다. 현대미술, 아니 비디오 설치작업은 난해한 것이란 편견을 단박에 날린다. 그도 그럴 것이 음악과 문자가 주재료다. 음악에 맞춰 화면에 한 편의 이야기처럼 문장이 이어진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의도든 아니든 지금의 현실에 직접 와닿는다.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장영혜중공업 개인전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의 풍경이다.

2인조 웹아티스트 ‘장영혜중공업’전
가정·경제·정치 세 가지 주제로
한국 사회 단면 위트 있게 그려

전시작은 가정, 경제, 정치 등 세 가지 주제로 최근 1년새 준비한 신작이다. 1층에 설치된 작품은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를 거꾸로 인용했다. 문자 텍스트의 내용만 보면 새해를 맞아 모처럼 가족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묘사한 단편소설 같다. 단란함과 거리가 먼 이들, 특히 다 큰 형제의 대화는 서로의 약점에 대한 공격과 욕설이 난무한다. 아이들이 키우는 개는 그 와중에 자꾸 식탁에 올라온다. 은유로든 직유로든 그야말로 ‘개판’인 가족이다. 상황에 대한 부가설명 없이도 쉽게 다가오는 낯익은 풍경이다. 낯익다는 건 이 전시가 머나먼 타인의 에피소드를 전하는 게 아니라 관객 자신을 겨냥한게 아닐까 생각하게 한다. 3층에 설치한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는 정치인의 거짓과 위선을 공격하면서도 그들을 너무도 쉽게 용서하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관람객에 나눠주는 리플렛 ‘인생을 망치는 길/예술가가 되는 길’. 이 역시 전시의 일부다. [사진 김상태]

관람객에 나눠주는 리플렛 ‘인생을 망치는 길/예술가가 되는 길’. 이 역시 전시의 일부다. [사진 김상태]

2층에 설치한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는 제목만 보면 가장 논쟁적일 작품이다. 앞서 ‘삼성의 뜻은 쾌락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를 비롯, 장영혜중공업은 이미 여러 차례 ‘삼성’을 작품에 다뤘다. 이번 작품은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 굴지의 대기업이 내놓은 각종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인생사를 펼쳐보인다. 거기에 ‘운 나쁜 경우’라며 이 기업에서 40대 중반에 쫓겨난 상황이 등장한다. 그래서 치킨집을 차렸다 자영업자의 비애를 겪고, 그래도 자녀에 뭔가 물려줘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등산 가서 찍은 꽃 사진을 휴대폰으로 공유하는 중장년 시기의 얘기는 풍자로 넘기기에는 참으로 현실적라 오히려 웃음이 터진다. 그러다 죽음에 임박해 이 대기업 이름이 붙은 병원을 이용할 수도 있을 터. 그 때 나오는 문장은 “삼성의 품으로 돌아가는 건 안심이 됩니다”. 순간, 온갖 비판을 할망정 이 대기업에서 일하거나 그 브랜드가 내포하는 중산층의 풍요만큼은 누리고 싶어하는 속내를 들킨 기분이 든다. 장영혜중공업은 능청스럽게 “아기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삼성이 우리 손을 잡아준다고 소개하는 저희의 작업을 삼성은 무척 뿌듯하게 느껴야한다고 생각한다”는 작가의 말을 남겼다. 다른 두 작품과 달리 화면을 분할, 문자와 나란히 흐르는 영상이 호기심을 더한다.

작품은 전시실 밖에도 있다. 건물 앞뒤에 각각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무엇을 감추나?’와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가 큼지막하게 적힌 배너가 걸려 오가는 시선을 자극한다. 관람객에 나눠주는 한 장짜리 인쇄물이자 전시장 홈페이지에 공개한 영상 ‘인생을 망치는 길/예술가가 되는 길’도 전시의 일부다.

전시를 기획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은 “이번 개인전은 ‘장영혜중공업’이 지속적으로 다루고 있는 자본과 정치에 대한 주제를 관통하며 한국 사회의 단면을 살펴보는 것”이라며 “우리의 삶과 부조리를 들추어 내는 듯한 그들의 사유는 위트 넘치면서도 통렬하게 다가온다”고 소개했다.

상대적으로 난해한 대목은 이름이다. ‘장영혜중공업’이라니, 초대형 기중기라도 동원해 작품을 만들 것 같지만 실은 장영혜와 마크 보쥬가 1999년 시작한 2인조 웹아티스트그룹이다. 웹아티스트답게 기존 작품 상당수를 홈페이지(www.yhchang.com)에 공개해 놓았다. 하지만 관람객 키만한 글자가 번쩍이는 전시장 분위기, 더구나 현재형 신작을 보는 경험을 대체하긴 힘들다. 이들은 영국 테이트미술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미국 휘트니미술관·뉴뮤지엄 등 이름난 곳곳에서 전시를 열어왔다. 국내 개인전은 2010년 이후 7년만. 그 사이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특별전에 참여했다. 6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3월 12일까지. 관람료 일반 5000원, 학생 3000원.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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