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얼굴 없는 SF작가 '듀나'와 e메일 교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신작 『대리전』의 표지 삽화

약간의 일러두기가 필요하다. 소위 '얼굴 없는 작가' 듀나(Djuna)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듀나는 그의 e-메일 아이디(ID). 이 두 음절의 ID 말고 그에 관해 알려진 바는 없다. 성별.나이.주소.학력 등등, 어떠한 단서도 공개된 적 없다. 심지어 2인 이상의 공동창작 집단이란 추측도 있다. 듀나와 접촉을 시도했다. e-메일이 유일한 통로였다. 출판사도 오로지 e-메일로만 연락하고 있었다. ID 듀나가 온라인 공간에 처음 출몰한 게 1994년. 이후 그는 SF소설집 세 권과 산문집 한 권을 냈고, 한 TV 프로그램도 그를 소개한 적이 있다. 하나 그의 얼굴을 봤다는 이는 없었다. 디지털 기호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그는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e-메일을 보냈다. 열흘에 걸쳐 여섯 차례 보냈고, 질문은 100여 개에 이른다. 그의 작품을 주목하는 평론가와, 이전 작품을 출간한 출판사, 과거 온라인 동호회 활동을 함께했다는 이도 취재했다. 그러나 밝혀낸 건 많지 않다. 최근 네 번째 소설집 '대리전'(이가서)을 발표한 듀나와의 e-메일 인터뷰 내용을 간추려 옮긴다.

얼굴 없는 작가 듀나가 자신의 사진 자리에 늘 걸어놓는 그림.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1893년 작 ‘절규’다. 그림에 어떤 속뜻이 있느냐 물었더니 “얼굴 대용일 뿐 다른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왜 이 작품만 굳이 고집하느냐 물었더니 “얼굴이 흐릿해서요”라고 답했다.

- 당신은 듀나인가.

"네."

- 그러면 증거를 대라.

"e- 메일로 지금 이 답장을 쓰고 있잖아요."

- 이전 저작들로 짐작하면, 당신은 현재 30대 중반~40대 초반으로 보이고, 능숙한 외국어 실력으로 봐서는 한때 외국에서 공부한 것 같기도 하다. 영화.만화 등 일부 장르의 매니어로도 보인다.

"저랑 성향도 다르고 하는 짓도 전혀 다른 낯선 사람이 보이는군요. 이 사람은 도대체 어디서 찾으셨습니까?"

-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가.

"이게 편해요. 온라인에서 덜 서툰 편이에요. 인터넷이 익명성을 보장하는 매체라면 왜 제가 그것을 활용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 당신이 황순원문학상 수상자가 됐다 치자. 그래도 안 나올 것인가.

"그러고 싶은데요. 설마 안 갔다고 치사하게 상금을 안 주지는 않겠죠?"

"문학은 고상한 게 아니다"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다. 10년쯤 전 그와 하이텔 SF 동호회 활동을 했다는 SF 전문가 박상준(39)씨에 따르면, 듀나는 1970년대 초반 태생의 여성이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고 고전음악 동호회 활동도 했다. 본명은 이영수이며 그의 오빠가 책 출간 일을 잠깐 도왔다. 이 때문에 듀나는 복수(複數)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문학평론가 김동식(39)씨도 이와 같은 추측에 동조했다. 이유는 듀나 작품의 질과 양이 개인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전문적이고 방대해서다. 그가 운영하는 '듀나의 영화낙서판'(http://djuna.nkino.com/movies)을 보면 이내 고개가 끄덕여진다. 위와 같은 분석을 토대로 질문을 묶었더니 "이런 것들을 알아서 뭐하시려고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 SF소설이란 무엇인가, 그저 공상과학소설인가.

"장르는 정의로 설명될 수 없어요. 늘 그 정의에서 벗어나려 하니까요."

- SF소설은 문학인가.

"문학이죠. 이건 좀 이상한 질문이군요. 마치 문학이 일정 기준을 넘어서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고상한 무언가인 것처럼 들립니다. 문학은 가치평가적인 개념이 아니에요."

- 듀나의 작품은 여느 SF소설과 다르다고 평론가들은 말한다. 문명 성찰적인 성격이 강하고 대중문화 코드를 수시로 인용하는 때문에 일반 SF소설보다 어려운 편이라는 평도 있다.

"제 건 굉장히 쉬운 편이에요. 복잡한 개념도 사용하지 않죠. 그렇다고 장르 입문에 이상적인 것도 아닌데. 그건 장르에서 쓰이는 농담을 인용하기 때문이지요. 전 제가 장르 내에서 차별화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네 번째 소설집 '대리전' 발표

여기서 잠깐. 듀나의 작품은 문예지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문단에서 그의 문학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소위 장르문학 중에선 이례적인 대우다. 작품의 불친절함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수차례 오고 갔다. 듀나의 답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모든 이를 위해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려면 보편적인 독자를 가정해야 하는데 전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책 속에서 낯선 개념과 마주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알아낼 수 없다면, 그 책은 다른 매체를 향해 열려 있는 것입니다. 독자가 컴퓨터 자판 몇 번 두드리면 될 일입니다."

이쯤에서 신작 '대리전' 얘기를 꺼내야겠다. 중편 분량의 표제작과 단편 세 편을 묶었다. 표제작만 말하자면, 시공간적 배경은 2005년 9월 경기도 부천의 신도시. 주인공 '나'는 외계인의 지구 관광 가이드다. 여기서 기발한 게, 외계인이 지구에 상륙하는 게 아니라 '엔시블'이란 초광속 통신장치를 통해 외계인의 정신만 지구에 오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몸이 숙주로 쓰인다. 그리고 소설 막판 우주전쟁이 일어난다.

한데 그 꼴이 볼 만하다. 배 나온 아저씨들이 헐렁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윙윙! 지구방위대다! 항복하라'는 소리가 울리는 장난감을 들고 전쟁을 벌인다. 숙주가 하필 아저씨고, 자기네 별에서 무기를 가져오지 못하는 외계인들이 급한 대로 지구의 몇몇 전자 부품과 장난감 껍데기로 광선 총을 만들어서이다.

소설 속 엔시블은 컴퓨터 앞에 앉아 세계를 유람하는 인터넷의 상징으로, 우스꽝스런 막판 해프닝은 짐짓 고상하고 엄숙한 피날레를 조롱하려는 작가의 의지로 읽혔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그냥 흥미로운 설정인 것 같아서" 뿐이었다. 대신 이런 설명이 붙었다.

"SF는 현재를 다루는 장르에요. 미래의 기술과 사회에 대해 얘기한다고 해도 그건 글을 쓴 당시의 버전이죠. SF작가건 역사소설가건 현재를 떠날 수는 없어요."

손민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