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의 새시대는 국민의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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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이 터온다. 길고 지루한 밤의 터널을 지나 그토록 그리던 새벽. 드디어 동이 터온다. 보았는가. 온누리를 뒤덮은 민주의 깃발. 모든 것을 압도하는 민주 국민의 물결이 출렁거리기 시작한 것을.
이한열군의 장례 행렬을 따라 연세대학교에서 시청 광장까지 걸어가면서 나는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분기점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온몸으로 절감했다. 이것은 1894년의 동학 농민혁명 이래 1세기에 걸친 혹독한 시련과 수난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의 꿈-인간의 존엄과 민족 자주의 새시대를 열기 위한 우리의 국민적 노력에 있어서 지극히 중요한 순간이다.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 해방 후 국민 주권주의 에 입각한 민주 정부를 표방한 지 4O여 년만에 비로소 국민이 명실상부한 나라의 주권자로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1961년의 5·16 군사정변으로부터 시작하여 만26년간 우리 젊음의 모든 기간을 끊임없는 좌절과 울분과 비탄의 음울한 색조로 온통 칠해버린 저 질식할 듯한 어둠의 시대가 마침내 역사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억하자. 여기에 오기까지 우리가 이미 충분한 대가를 치렀음을. 1980년 5월의 광주.그 엄청난 참화 속에서 오늘의 굳건한 민주 역량이 배태되어 나온 것이다. 전태일에서부터 박종철·이한열 군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제단 앞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던지는 젊은이들이 줄을 이어 나타난 것은 차라리 하나의 신화에 가깝게 느껴진다.
푸른 수의를 입은 어느 여학생이 법정의 최후 진술에서 『…도대체 이 땅의 젊은이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죽어야 나라가 바로잡힌단 말입니까. 자유여, 민주여, 어서 오라!』고 절규하다가 끝내 말을 맺지 못하고 울먹이던 광경을 우리는 언제까지고 잊지 못한다.
이제 이한열군의 주검과 함께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많은 시대도 땅 속에 묻으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채비에 나서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이 시대가 누구의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 시대는 더 이상 집권 세력의 것이 아니요, 고관 대작이나 대기업가들의 것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야당의 것도, 「양김씨」의 것도 아니다. 이 점에 대하여 추호라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 시대는 누구의 것인가. 지극히 평범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다. 「국민」의 것이다. 그렇다면 들판의 이름 없는 풀처럼 바람이 불면 한쪽으로 눕고 바람이 지나면 또다시 일어나면서 그 끈질긴 생명력으로 뿌리에 뿌리를 뻗어 마침내 얼어붙은 억압의 대지를 뚫고 민주주의의 찬연한 봄을 꽃피울 민주 국민의 것이다.
지난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조치를 밝히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부산의 한 택시 운전기사는 이렇게 말했다. 『6·10 이후 시위가 계속되면서 하루 수입이 1∼2만원씩이나 줄어들었지만 안 벌리는 데 대한 불평을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라는 게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지를 길거리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경적을 울리면서 시위에 적극 동참했는데 이제 보니 나도 민주화에 한몫을 한 것 같아 으쓱해진다』
그렇다. 이 시대는 이 택시기사의 것이며, 또 그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처소에서 갖가지 방식으로 「민주화에 한몫을 한」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것이다. 「민주화에 한몫을 한 것 같아 으쓱해지는」이 티없이 맑은 민주 시민들의 자부심이 이 시대를 지킬 것이며, 그 자부심을 손상하거나 그 앞에 도전해 오는 어리석은 세력들은 모두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 검불처럼 흩어져 휩쓸려가고 말 것이다.
그날 시청 앞을 대하처럼 유유히 굽이쳐 흐르던 백만인파는 참으로 아름답고, 참으로 부드러웠다.
백만 인파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아무 것도 파괴되거나 약탈당한 것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세계 최고의 문화 민족이 아니고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권력은 이 백만 군중의 기다림 앞에 숙연하고 겸허한 자세로 서야 한다. 그들의 침묵을 우뢰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이고 철저하고도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하여 타산과 술수를 초월한 근원적이고 성의 있는 민주화 조치를 지체없이 추진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예컨대 「양심수」를 석방한다고 하면서 온 나라가 다 아는 대표적인 양심수 다수를 그대로 묶어둠으로써 오히려 문제 악화의 소지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든지,「고문 종식」을 내세우면서 온 나라를 분노로 떨게 한 「성고문」의 주범 문 모형사나 김근태 사건 등 숱한 고문 사건의 범인들을 여전히 거리에 활보하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 등은 아직도 시대의 흐름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일부터 시정되어야만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민주화로의 대행진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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