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간섭없는 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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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그 어렵다는 고시에 합격하시고 법대위에 높게 앉아계신 판·검사님들은 이나라 민주화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읍니까』 86년4월23일. 가두시위를하다 구속기소된 한 여학생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서 재판장과 검찰을 향해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어 이 여학생은『나는 괜찮다』면서 판· 검사를 향해 『하루속히 참회하고 민주화 대열에 동참하라』 고 충고(?) 까지했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있는지 주객이 뒤바뀐 법정은 물을 끼얹은듯 조용하기만 했고 판·검사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뿐이었다.
앳된 여학생의 이같은 당돌함은 바로 국민들이 사법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웅변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해방이후 40년가까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위태위태한 느낌을 주던 사법부의 권위는 85년5월의 서울 미문화원사건이후 잇단 공안사건 재판을 계기로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시국의 흐름을 정치권에서 걸르지 못한채 뒤처리를 도맡게된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일부의 비난을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재판은 요식행위로만 보였고 판결은 추인절차에 불과,「인권 최후의 보루」 는 설땅을 잃어가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 「신의 대리인」 오늘의 법정은 재판장을 향해 욕설과 고함이 오가고 고무신짝이 날아가는 지경이 됐다.
법관출신인 김상철변호사는『법관은 폭력이 아닌 최후의 사회적 권위다. 따라서 법관에게는 보통인 이상의 양심과 용기가 기대되고 그에 상응한 존경을 받게되는 것이다』라며 『법관이 99%의 일반사건에서는 정의와 공정을 잘 지키고 나머지 1%의「민감한」 사건에서 다소 문제가있다 하더라도 그 99%는 일상 사무적 성격을 벗어나지않는 것이기 때문에 나머지1%에 평판을 좌우하는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지적했다.
85년12월 정년퇴임한 이일규대법원판사는 퇴임사에서『사법권 독립은 법관들 스스로가 정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하는 데서만 이뤄지는 것이다. 법관의 손에 의해 사법권독립이 확립될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꽃이 활짝 피리라고 확신한다』 고 말했다.
사법권의 독립.
삼권분립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새삼 들먹이기조차 쑥스런 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법권의 독립이 자주 거론돼 온게 사실이다. 특히 한창 거론되고 있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요체는 언론자유확립과 사법권의 독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사법권의 독립은 크게보아 법원의 독립과 법관의 독립으로 나눠진다.
법원의 독립은 인사· 예산등 법원의 자치를 위한 행정상의 독립이고 법관의 독립은 간섭없는 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법부의 신뢰·권위와 직결된다.
현재 대법원장은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고 대법원판사는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토록 되어있으며 일반법관은 대법원장이 임명하고 있다.
이에대해 대한 변협은 제3공화국때와 같은 「법관추천회의」 의 설치를 제안했다.
대법원장은 법관추천회의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고 법관인사도 이 회의의 동의를 거치도록 한다는 것. 현직에 있는 거의 모든 법관들도 이제도의 부활을 바라고 있다.
특히 대법원판사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도 법관추천회의가 필요하고 법관 인사를 둘러싼 대법원장의 전황이나 외풍을 막기위해서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현직에 있는 법관들은 외풍의 대부분을 인사문제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한 부장판사는 이와관련,『주요시간에서 양형보다 유·무죄부분에서 큰 부담을 느낀다』 며 『승진등 법관으로서의 목숨을 쥔 상급자를 통해 우회적 방법으로 뜻을 전달해 올때 버티기 어렵다』고 실토했다.
이런 상황에서『십자가를 지라』 는 양심의 가책과 사회적 요구때문에 몇번씩 사표생각을 안해본 법관이 없을것이라고 털어놓았다.
71년6월 국가배상법이 위헌이라고 정부에 불리한 주장을 했던 9명의 대법원판사가 전원 재임명에서 탈락했고 박대통령시해사건의 김재규등에 대한 상고심에서 소수의견을 냈던 5명의 대법원판사가 판결선언후 곤욕을 치르고 사뢰한 일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예산의 독립 또한 시급하다. 사법부의 예산이 행정부의 심사를 거쳐 국회에서 통과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때문에 행정부의 눈치를 살펴야하고 종속관계가 형성된다. 대법원장이 요청하는 예산을 행정부의 실무자들이 심사하면서 전권을 행사할때마다 사법부는 무력감에 빠지게된다.
그래서 지난해 대한변협이 법원예산은 대법원이 국회에 직접 제출토록하자고 제안했을때 큰 호응을 받기도 했던것이다.
사법권독립이 문제되는 것은 이같은 외재적 요인에서 오는것이 사실이지만 법관스스로가 이를위해 노력하는 내재적 요인의 개선 또한 시급하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권모양에 대한 항소심에서 원심대로 징역1년6월의 실형이 선고되던날 한 중견법관은『이제 사법부는 어떤 변명도 할수가 없게 됐다』 며 침통한 표정을 지은일이 있다.
대법원판사를 지낸 이회창변호사는 『법관생활중 외풍을 의식해 판결을 그르친 적은 없었다』 며 『가장 중요한 것은 오히려 법관 개개인이「과천에서부터 기는」풍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는 일이다』 라고 했다.
사법부가 신뢰를 회복하고 독립성을 되찾아 민주화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그운영의 개선은 물론 외풍에 적응해 「눈치재판」 에 안주해온 법관 스스로의 의식개혁 또한 시급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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