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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제1장)하늘과 대지(32)소설민족생활사 백두산(32)황석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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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덕이가 절하고나서 검 단웅이 내린 무릎뼈를 받았다. 이어서 청구의 상설이 말하였다.
우리가 조선과 강화를 맺음에 있어 제일 먼저 중요한 사실은 오래전부터의 우리의 관경이었던 검은강을 넘지 말라는 것과 유족과 발족의 경계 또한 침범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요.다음은 우리도 조선의 관경을 함부로 침입하지 않으며 고죽과 옥저에 관하여 참견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서남쪽으로 제요도당의 동진 세력을 막아야하고 청구는 북의 동호와 서북의 예와 맥의 힘을 또한 경계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서로 싸우면 예 맥이 동과 남으로 진출하여 우리의 땅을 잠식할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족과 청구족이 힘을 합쳐야만 구한의 화평한 천하를 이룰수가 있을 것입니다. 조선 상이 설의 제안에 답하였다.
우리는 이미 신시의 승통을 이으셨으며 큰한중의 큰한이신 단웅 검님의 하명을 받잡고 청구의 큰한을 인정했습니다. 강화의 여러 조건이 합의되기 전에 먼저 우리는 밝 종족의 아홉 지파에 이 사실을 널리 알릴 것을 제안합니다. 이 회합이 끝나는 대로 각 부족의 대읍에 사자를 보내어 단웅 검님의 뜻을 알림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설은 잠시 침묵을 지켰고 덕이의 곁에 앉았던 상 다루가 속삭였다. 이는 조선이 구한의 지도권을 재삼 명확히 해두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저들의 발 아래 두려는 수작입니다.
덕이는 빙굿 웃고나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내 이미 신시의 전통에 따라서 검님의 하늘 같은 큰뜻에 따랐습니다. 그렇지만 조선 큰한께서는 이미 섭정의 자리를 맡고 있지 않습니까? 다른 여러 부족들도 이 사실을 알고있을 터인즉 자칫하면 큰한께서 오히려 실덕하시게 됩니다. 제가 청구의 한이 되었다는 사실은 친히 사자를 각 부족들에게 보내어 또 다른 자리를 만들까 합니다.
안되오. 한님의 몸을 빌어 우리 종족을 천하에 자리 잡도록하신 환웅 검님 이래로 추호도 삿됨이 없이 이어 내려오신 단웅 검님의 뜻을 욕되게 할 참이요?
조선측의 무장 우가 큰소리로 외쳤고, 청 구의 친위 비장 홀도 대뜸 칼을 빼고 일어설듯이 화를 벌컥 냈다.
무슨 말이요? 당신들은 이미 검님의 뜻을 앗아버리고 섭정을 맡은 큰한을 모시지 않소? 이제와서 어느 부족의 큰한이 바른 승통이라 믿겠습니까. 이제부터 천하가 어지러워질 것이요. 그것은 조선 때문이요. 우리 청구 유 발의 제부족은 다 같은 구한의 자리와 관경을 공평하게 지켜나갈 것이요.
그때에 조선 섭정 한배가우를 꾸짖었다.
그대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그렇게 화를 내는가? 내가 섭정을 맡게된 것도 역시 단웅 검님의 뜻을 받잡아 그리 된 것 입니다. 이는 각 부족의 큰한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돌아가며 검님을 모시면 언제나 섭정이 될수가있는 일입니다. 다만 구한의 힘이 하나로 모여 강대한 밝종족을 이루고자 함이라, 청구의 큰한이 바로 섰음을 알리고 나아가 여러 부족들과 평화롭게 한식구를 이룬다는 뜻에서도 저희 검성에서 한번 회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덕이도 공손히 답하였다.
좋은 말씀입니다. 검성에 꼭 가겠습니다.
조선 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서로의 관경을 침범치 않을 것을 약조하십시다. 그러나 유 부족과 발 부족의 관경뿐만 아니라 고죽과 옥저는 원래가 우리의 한이 나가서 번성하여 이루어진 대읍이라 이미 조선 관경입니다. 또한 진번 임둔 양주의 부족들 역시 우리와 이미 강화 하였으므로 그 관경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청구 상 설이 말하였다.
글쎄요…고죽과 옥저는 모두 함께 조선의 관경에 속해 있다는 것은 알겠지만, 진번 임둔 양주는 우리와도 예전부터 강화를 맺어왔읍니다.
조선 상이 말하였다.
어쨌든 조선과 청구는 이번 강화를 통하여 싸우지 않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우리 식구끼리의 분쟁 보다는 오히려 저 큰 강을 두번 넘어 동쪽에 있는 너른 땅으로 뻗어 나가야 할 것 입니다. 청구에서 북방동호의 세력을 견제하는 동안에 우리는 서남쪽 당요의 세를 막아내고, 또한 우리는 힘을 합하여 남과 동으로부터 예 맥을 압박할 수가 있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합군은 남은 힘으로 동쪽의 기름진 땅을 정벌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번 강화의 내용이 대충 양쪽에서 제안된 셈이었다. 첫째는 청구의 새로운 큰한이 자리에 오른 일을 계기로 조선의 밝 종족 검님이 계시는 대읍 중의 대읍 검성에 구한의 전부족 큰한들이 모이자는 안이 이미 합의를 이루었다. 둘째는 조선과 청구는 서로의 관경을 인정하고 함부로 침범치 아니하되 청구족의 유와 발의 땅, 조선쪽의 고죽 옥저 역시 각각의 관경을 인정하자는 것이며, 진번 임둔 양주는 양쪽 모두가 그 관경을 확정지을 수는 없다는 안이었다. 세째는 조선과 청구가 서로 화약을 맺되, 청구는 동호의 세를 막고 조선은 당요의 세를 막아내니 형평을 이룬 셈이요, 두 부족이 힘을 합하여 동과 남에서 예와 맥을 압박할 수가 있다는 안이었다.
온종일 입씨름을 한 끝에 양측은 매우 애매하고 변화불측한 약조를 피하여 다음과 같은 분명한 강화 조건을 만들었다.
조선과 청구는 서로의 관경을 인정하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유와 발의 땅, 고죽과 옥저의 땅 역시 그 관경을 인정한다.
조선과 청구는 동호와 제요도당과의 분쟁이 있을 때에 서로군사를 보내어 돕는다.
예와 맥이 이미 이빨과 입술. 처럼 가까운 동맹을 맺어 강대한 세를 이루었으므로, 조선과 청구도 힘을 합하여 예 맥의 팽참을 막아낸다.
의견의 일치를 본 다음에 그들은 각기 소 한 마리씩을 내어 동쪽을 향하여 천단을 쌓고 희생을 바쳤다. 양쪽의 박사겸 상이 나와서 집전하고 청구 큰 한덕이와 조선 큰 한 한배가 제주가 되어 하늘에 이 맹약을 아뢰었다. 입술에 소의 피를 바르고 두 박사는 각각 발굽을 던져 행운을 점쳤다. 그들은 각기 약조한 바를 암송하여 아뢰고 소의 뼈에 조문을 새겨서 서로 간직하였다.
이어서 저녁이 되었으니 전사들은 그들대로 큰한 이하 상 오가등의 호족들대로 양측이 사이좋게 영막 안에 둘러앉아 잡은 소와 가져온 술로 먹고 마시며 사귀었다. 이제 큰한 한배와 덕은 나란히 앉았고 양측의 신하들도 섞여서 앉았다. 밖에는 모닥불이 훨훨 타올랐고 영막안에는 관솔불이 곳곳에 밝혀져있었다. 덕이는 한배와 나란히 항아리에서 술을 퍼서 잔을 서로에게 내밀었다. 덕이가 말을 꺼냈다.
우리는 만난적이 있습니다.
나를 만났다구요?
큰한과 저 사람을 만난작이 있지요.
덕이가 다른쪽에서 떠들썩하며 비장 홀과 술을 나누고 있는 우를 손가락질 했다.
나와 비장을? 언제….
오랜 옛날, 강 상류의 황야에서 그때 노루를 잡아 서로 다투다가 사귀게 되었지요.
한배는 미간을 찌푸리고 덕이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릎을 쳤다.
아, 기억이 나오. 그때 그 가죽 옷을 입었던 소년 전사. 우리가 함께 광야에서 밤을 지냈지요.
그때에 큰한께서 내게 구리며 구한의 각 부족에 대해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요.
한배는 덕이의 손을 꽉 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내 생명의 은인이었지요. 우리를 동호족에게서 구출해 주지않았소?
한배는 그의 손을 잡으채 들뜬 목소리로 우를 불렀다. 비장, 비장!
우가 술을 마시다가 어리둥절하여 곁으로 다가왔고 한배는 바삐 말하였다.
자네 생각나나? 우리가 아리강 상류로 선비 수련을 나갔을 때, 그 때에 만났던 북변의 소년이 생각나지?
예, 동호족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빼내주었지요.
한배가 우에게 말하였다.
바로 이분이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자네가 가장 아끼던 동검을 빼주었던 그 소년 전사가 바로 이분 큰한이시다.
덕이는 웃음을 지었고 우는 두손을 잡으려다가 공손하게 큰절을 올렸다.
강물은 큰 흐름에 이르면 꼭 만난다는 말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덕이가 말하였고 한배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렇습니다. 청구족의 덕이라고 했지요. 비장과 나는 옛날일을 얘기할적마다 꼭그 소년 전사얘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실로 오늘의 화약은 한님께서 미리 정해주신 일입니다.
우가 말하였다.
과연 청구의 큰한께서는 인물이 십니다. 저희도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되리라 믿고 있었습니다.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으며, 상 설이 말하였다.
저도 오래 전부터 조선 큰한과 비장을 알고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저희 큰한께서는 두분을 마음의 깊은 벗으로 여기셨고, 스스로 일어나기 전에는 만나지 않으리라 결심하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조선 비장 우는 허리에서 동검을 뽑더니 그 칼을 공손히 두 손에 받쳐들고 큰한 덕에게 내밀었다.
아무리 벗이라 하나 이미 큰한의 자리에 오르셨으니 저의 우정을 다시한번 이 칼을 바쳐서 다짐합니다.
덕이도 이번에는 자기칼을 빼어 그에게 내밀었다.
자네가 준 동검은 내가 동호의 땅에 끌려가 빼앗기고 말았네. 이 칼을 받아 주게.
그들은 서로 칼을 바꾸어 찼고, 한배는 기쁘게 말하였다.
이로써 조선과 청구는 형제의 부족이 되었다. 누가 나가서 양측 전사들의 화살을 가져 오시오.
영막 밖으로 나갔던 비장 홀이 화살 두대를 가지고 돌아왔고 한배는 그것을 모아 두 손에 쥐고 꺾었다.
우리는 한님의 밝은 빛이 대지를 비추고 있는한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황웅 검님 이래로 치우 검님의 영광스런 옛일에 따라서 조선과 청구가 한몸인 것을 맹세하오.
하루 낮과 밤을 지내고나서 양측은 대번에 강화를 겉으로 맺은 이상으로 깊숙이 친화를 이루어 헤어지게 되었다. 군대가 서로 갈려갈제 우는 따로이 덕이에게 와서 삼육의 예를 올리려 하였으나 덕이 극구 만류하였다.
아무리 법도가 그러하다지만 자네와 나는 벗이 아닌가. 다음에 사사로운 자리에서 만나면 이런 허례는 용납지 않으려네. 자네도 나를 벗으로 대해주게.
한배와 덕이는 영막이 걷혀진 낮은 언덕으로 나란히 말을 달 려올라갔다. 한배가 검은 강 강변의 너른 들판을 손가락으로 가리컸다.
저것 보게, 이것이 우리의 관경일세. 그러나 이 작은 강을 서로 건너고 저멀고 먼 큰 강줄기를 두번 넘어서 있다는 기름진 들판을 함께 정벌해야만 하네. 그곳이 바로 구한의 밝 종족이 하나가 되어 자리를 잡을 땅일세.
덕이도 말하였다.
내가 강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아무 내색을 하지 않은 것은 내 부족의 이익만을 생각해서가 아닐세. 우리는 아직도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네. 서로 약조한 것들 보다 더 많이 이루어야되네.
그들은 서로 강의 이편과 저편을 향하여 말 머리를 돌렸다.
청구의 대읍으로 돌아온 덕이는 그로부터 한동안 머물면서 장로들이 이룬 화백모임에 나아가 그들의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는 설에게 맡겨서 땅과 소읍의 영역들을 재조정하여 다시 정해 주었고, 이곳은 읍으로 격하 시켜서 한이 다스리도록 하였다. 수많은 공장이와 백성들이며 전사들을 모두 새로운 대읍 애터로 옮겨가 살도록 하였다. 이는 애터가 사방이 강으로 둘러싸였고 개간할 땅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유와 발의 땅에 가까운 때문이었다.
돌아가서 얼마후에 덕이는 새로이 설의 딸을 맞아들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청구의 세습호족이었던 설과 혈연을 맺어두는 것은 다른 호족의 세력을 무마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애터가 새 대읍이 되던 해에는 또한 풍년이 들었다. 북쪽동호의 땅에서 검바우는 가끔씩 작은 분갱을 치렀지만 이미 동호의 일개 수장으로는 넘볼수 없는 지역이 되어 있었다.
덕이는 아름이에게서 이미 아들을 보았으며 설의 딸에게서는 또한 딸을 얻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 해동안 애터는 차츰 번성하였다. 조선과는 사자가 뻔질나까 내왕하고 상인들은 마음대로 관경을 넘나들었다. 청구에서는 특히 가축과 산과며 털가죽이 볼만했으며 조선에서는 해물과 쌀과 비단이 오고갔다.
어느 해 겨울에 큰한 덕은 비장 홀을 거느리고 한 검바우가 다스리는 동호의 땅에 나아가 군사 조련을 겸하는 사냥을 하고 있었다. 사냥을 시작한지 하루만에 애터로부터 급사가 달려왔다.
조선에 변이 일어났다 합니다.
무슨 일이냐?
잘모르겠읍니다만 사자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상께서 만나보시고는 큰한께 급히 돌아오시도록 아뢰라는 말씀이 계셨습니다.
큰한 덕은 북방의 분쟁 때에 조선에서도 군사를 내주었던 일도 있고 하여 홀과 함께 급히 애터 대읍으로 돌아갔다. 조선의 사자는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옆드려서 급박한 사정을 고하였다.

<그림 강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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