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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반도로 굽이쳐 내려오던 산맥이 남해바다를 앞두고 우뚝 먼춘 거대한 산악군이다. 해발 1천9백15m의 천왕봉을 정점으로 제석봉·반야봉·칠선봉·덕평봉·노고단과 같은 1천5백m가 넘는 연봉이 우람하게 버티고 있다. 3개도(전북·전남·경남)와 5개 군(남원·구례·하동·산칭·함양)과 15개 면에 걸쳐 그 둘레만도 국립공원 1호답게 육지공원중 가장 넓은 물경 8백여리에 이른다.
지금은 노고단 서쪽 시암재까지 포장된 관광대로가 개설되어 팔자 좋은 사람은 차 안에 편안히 앉아 『산이 거기 있어 찾아 왔노라』며 정복을 만끽한다. 이제 지리산은 심산유곡이 아니다. 경제성장에 따른 레저 붐과 더불어 허리 힘 좋은 관광객이 어느 한 철을 가리지 않고 몰려든다.
지리산은 한마디로 절의와 항쟁으로 점철된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떠올려진다. 임진란 때 승병의 집결지로, 동학농민전쟁의 배후 기지로, 한말에는 고광순 의병부대가 최후까지 일본군에 항쟁하여 순절의 피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지리산은 6·25전쟁을 통하여 분단 비극의 대표적 상징으로서, 오늘도 한 덩어리의 휴화산이 되어 통일의 그날을 염원하고 있다.
지리산을 생각하면, 북에서조차 반동 집단으로 낙인 찍혀 역사의 한 장으로 사라져버린 「남로당의 비극」이 먼저 떠오른다. 지리산은 남로당의 테러리즘과 그 궤멸의 과정에 가장 중요한 현장으로 분단 역사의 상처를 증언하고 있다.

<남한에 폭동을선동>
1946년, 일제하 토착 좌파 항일운동자들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고, 그 책임자로서 박헌영은 「대구폭동(46년)」「여수·순천반란사건(47년)」「제주도폭동(48년)」을 배후 조종하며 남한 전역에 폭동을 선동했다. 현대사 전공학자들은 그들이 벌인 살상·방화가 민중들로 하여금 좌파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48년초 첫 좌익입산>
빨치산·산사람·야산대·공비·폭도 따위로 불리는 한 떼의 좌익 입산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48년 2월 공산계열이 유엔 한국위원단의 입국을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2·7구국투쟁」을 전개하면서부터였다. 박헌영의 한 팔이었던 이현상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유격활동을 벌인 것도 그 무렵이다. 그해 10월 여순반란사건에 패주한 잔당을 흡수하여 지리산지구 제2병단을 설립하면서부터 지리산은 좌우 이데올로기의 수난 현장으로서 그 숙명이 시작된다.
1950년 6·25전쟁이 날 때까지 지리산은 군경이 소탕하지 못했던 몇 안 되는 취약지구 중의 하나였다. 그만큼 지리산은 문어발처럼 흘러내린 수많은 골짜기로하여 잠복이 용이했던 곳이다.
지리산이 빨치산 활동의 본격적인 거점이 되기는 50년 「9·28 서울수복」으로 삼남의 인민군이 퇴로를 차단당하면서부터다. 인민군 치하에 행정력을 장악했던 남로당 세력은 도마다 도당사령부로 전투부대를 편성하여 소백산맥 일대로 모여들었다. 혈로를 뚫고 월북을 도모하던 인민군 정치부·문화부·공작대요원들이 그들과 합세하니 지리산은 「후방의 적」 의 심장부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북으로 밀어붙이는 제1전선에만 바쁠 때 지리산채에는 그들 자영의 군수공장까지 있을 정도였다.
50년10월 국군 11사단이 남원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지리산 일대에 본격적인 공비토벌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만3년, 53년9월18일 부령선인으로 일제하 옥중생활만도 12년에 이르는 빨치산의 전설적인 인물 이현상이 반야봉 동쪽 5km지점 벽점골에서 토벌군의 총격으로 온몸이 벌집이 된채 산화하기까지 지리산은 전방 전선을 무색케한 피의 격전장이 되었다.
54년 첫 여름 무렵에야 지리산에도 총성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왔다. 그러나 피아간에 죽어간 무주고혼의 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핏빛 철쭉꽃만 온 산을 덮으며 흐드러지게 피고, 휴전선의 철책은 더욱 견고해져갔다.

<휴전선은 아직여전>
지리산은 가시덤불길을 걷는 억센 부정의 산으로 일컬어져 왔다.
이 민족의 항쟁과 수난의 역사를 그 산이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 혼란한사회를 보고 지리산에 은거하며 이상향으로서의 청학동을 찾으려했던 최치원의 바람이 지금도 품넓은 모정으로서 지리산 속 그 어디에 있을 것이라 후세 사람들이 믿어왔다.
「지리산의 문학」은 이제 모정으로서의 화해를 향해 일군의 젊은 시인과 작가에 의해 시작되고 있고, 부정의 힘찬 필력으로 그 비극은 파헤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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