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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보수를 찾아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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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보수(保守)’란 ‘보전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이미 확립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자유시장경제나 민주공화국 같은 기본 원칙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엔 그런 보수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말만 있을 뿐 실체는 없었다. 허상을 어떻게 보전하고 지킬 수 있겠나. 결국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것을 찾아서 지키려 애썼다. 기득권과 이권이 그것이다. 보수와 부패가 동의어처럼 돼 버린 게 그래서다. 보수란 말이 매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영국 보수당의 생존 비법은
변화를 거부하지 않는 자세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되려면
무엇을 지킬지 잊지 말아야

그래선지 이 땅의 이른바 보수정당들은 단 한 번도 ‘보수’란 이름을 써본 적이 없다. ‘민주’나 ‘자유’, ‘정의’처럼 진보에게 더 어울릴 용어들을 선호했다. 아니면 ‘한나라’ ‘새누리’ 같은 가치중립적 표현을 썼다. 그런 가면을 쓰고서도 자칭 보수들은 여전히 같은 걸 추구했다. 기득권과 이권 말이다.

사실은 선진국도 문제가 없진 않은 모양이다. 진짜 보수가 뭔지 설명하는 책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영국의 보수사상가 로저 스크러튼의 새 책 원제 역시 『보수주의자가 되는 법(How to be a conservative)』이다. 한국에선 『합리적 보수를 찾습니다』라는 보다 한국적 제목으로 번역됐다. 스크러튼이 설명하는 진짜 보수주의 가치는 이렇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물질적·정신적 유산을 잘 지켜 후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신념.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연대의식. 스스로 세운 원칙을 어기지 않는 강한 의지.”

이대로라면 우리네 보수들은 훨씬 더 진짜 보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보수정당이 지키고자 했던 건 가치가 아니고 사람이었다. 단 한 사람의 이름 아래서 배려도 원칙도 없었다. 그의 눈에 드느냐 아니냐만이 선악의 기준이 됐다. 달콤한 혀를 가진 사람과 돌쇠처럼 행동하는 사람만이 주변을 채웠다. 그 한 사람도 선대의 유산을 지키겠다는 신념은 있었다. 반공(요즘은 종북)의 그늘에 가린 민주공화국, 성장의 명분 아래 재벌에 특혜를 주는 시장경제가 그것이었다. (놀랍게도 아직까지 그런 개발독재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이런 시대착오적 가치에 매달리다 그는 가뜩이나 허약한 보수를 결딴냈다. 맹목적 충성심과 애국심을 구분하지 못하는 궤변가들이 보수의 본모습인 양 만들어 버렸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그래도 다행인 것은 상식적인 보수들이 남아 있었던 거다. 그들이 사이비 보수정당의 문을 박차고 나왔다. 새로운 보수정당을 만들겠다고 한다. 우리네 정치사에서 탈당이나 분당, 창당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 하지만 이번엔 좀 기대가 생기는 건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들이 보수의 가치를 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 밑으로 헤쳐 모여가 아니라 특정한 가치의 텐트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거다. 대한민국 보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처음이니만큼 혼란과 갈등이 없을 수 없다. 새 보수당의 키를 쥔 유승민이 제시하는 노선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지나치게 좌클릭됐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탈당 의원 수가 줄긴 했지만 기대가 줄진 않는다. 발전적인 논쟁을 거쳐야만 명실상부한 정책정당으로 태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훈수를 두는 것뿐이다. 그렇게 걱정할 게 없다는 게 내 훈수다. 오히려 보수가 사는 길이 그것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지키는 게 보수지만 시대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면 수구(守舊)가 되고, 거슬러 고집하면 반동(反動)이 된다. 영국 보수당의 전신은 귀족과 대지주의 이익을 대변했던 토리당이다. 그런 정당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도 변화를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수적 제국주의자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자계급의 참정권 확대로 보수당 지지층을 크게 넓혔다. 특권계급의 보수를 나라 전체의 보수로 확대한 ‘일국 보수주의(One nation conservatism)’가 그것이다.

50년 뒤에는 스탠리 볼드윈이 ‘새로운 보수주의(New Conservatism)’를 제창해 또 한 번 바꿔놓는다. 그것은 산업적 동반자 관계를 중시한 사회적 조화와, 대결보다 합의를 중시하는 적극적 사회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보수였다. 1930년대 유럽을 풍미한 파시즘이나 공산주의가 영국에서만 맥을 못 춘 것이 그 덕분이었다. 극단적 이념의 시기에 보수당이 중도를 지켜 사회적 불안정을 막고 질서와 안정이라는 보수의 가치를 지켜낸 것이다.

탈당선언문을 보니 그들의 위치는 디즈레일리와 볼드윈의 보수당보다 한 걸음도 왼쪽으로 가지 않았다. 걱정할 게 없다는 얘기다. 이제서야 진정한 보수의 가치를 찾아냈을 뿐이다. 스크러튼도 말하지 않았나. ‘약자를 보호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연대의식’, 그것이 지키고 후손에서 물려줄 보수의 가치인 것이다. 걱정은 지금부터 해야 한다. 처음으로 보수의 길을 찾아나선 이 ‘새내기 보수’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기득권과 이권의 함정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유력 후보 유치 경쟁과 세력 규합에 한눈을 팔면 틀림없이 빠지게 될 함정이다. 피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다. ‘무엇을 보전하고 지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