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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분석]다시 한국 찾은 '천경자 미인도' 佛 감정팀…위작 판정 근거는

중앙일보

입력

천경자 화백이 생전에 "내 자식이 아니다"라고 했던 '미인도'(국립현대미술관 소장)에 대해 검찰이 천 화백의 작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검찰의 조사 결과는 논란만 증폭시켰다.

유족들은 검찰 조사에 불복해 항고하기로 했다.

검찰의 감정에 참여했던 프랑스 감정업체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한국 검찰의 결론은 논리적 근거도 없이 과학적 분석 결과를 전적으로 무시한 것"이라고 반발했다.

27일에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로 했다.

또 이번 미인도 감정 결과를 국제 학술지에 게재할 방침이다.

프랑스 감정팀의 미인도 분석 보고서가 국제 학술지에 실린다면 한국은 국제적 망신을 자초하게 되는 셈이다.

이들이 일부러 한국을 다시 찾아오는 건 검찰이 자신들의 분석 결과를 배제한 채 조사 결과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검찰은 오히려 뤼미에르 감정팀이 위작 논쟁의 경과를 무시했다고 평가 절하했다.

중앙일보는 63쪽에 이르는 보고서 전체를 입수했다.

자료가 방대해 모두 실을 수는 없지만 이들이 위작이라고 판정한 주요 근거들을 정리했다.

주관적 판단 차단하고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프랑스 루브르미술관과 협업하며 기술력을 인정받는 전문가 그룹이다.

다중스펙트럼, 초고해상도 촬영, 1650층의 층간분리 기술이 동원됐다.

감정팀이 검찰에 제출한 분석 보고서는 6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분석에는 광학, 물리학, 수학이 동원됐다.

보고서는 천 화백의 원작들과 미인도의 분석 데이터를 모두 수치화해 비교했다.

감정인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는 모두 차단했다.

미인도의 출처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 경위, 위작 논란의 경과, 육안을 통한 일반적인 안목 감정 결과 등이 그것들이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의 쟝 뻬니코(Jean Penicaut) CEO는 천 화백 유족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객관적이고, 수치화가 가능한 범주 안에서 작품 자체 분석에만 집중했고 어떤 주관적 해석이나 논평도 삼갔다"고 밝혔다.

"작품 단층에서의 광선의 반응, 휘도, 명암 대비, 마무리 작업 등 수학적 확률 계산을 위한 요소들을 탐색해 도출해낸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뻬니코 CEO는 이런 과학적 분석을 통해 얻은 결론이 "천 화백이 생전에 증언했던 내용을 증명한 셈이 된 것"이라고 했다.

천 화백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분석이 아니란 점을 강조한 것이다.

감정팀이 미인도를 위작으로 판단한 대표적인 근거는 명도 대비와 빛의 균형, 그림 속 인물들의 흰자위 채색 특징이다.

감정팀은 "위작자가 원작자와 동일한 안료, 동일한 실현 매체를 사용하더라도 개인이 지닌 빛에 대한 고유한 지각은 전혀 다르다"고 강조했다.

모방할 수 없는 화가 고유의 특징 수학적으로 수치화해"

같은 물감과 붓, 종이를 사용해 모방은 할 수 있지만 빛에 대한 원작자의 인식은 모방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 차이를 시각적으로 구분하는 건 어렵지만 수학적으로는 가능하다는 게 뤼미에르 테크놀로지의 주장이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분석 기법을 이용해 미인도와 동 시대 천 화백의 작품 9점을 비교했다.

천 화백 작품들의 광도 편차값은 20~30으로 일정했다.

반면 미인도는 45.29로 다른 작품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감정팀은 이를 통해 "K5(미인도)는 그려진 물체들의 콘트라스트에 있어서 다른 작품들과 동일한 특징을 보이지 않고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설명했다.

A와 B의 채도는 전혀 다르게 보이지만 실제로 측정해보면 동일한 회색의 명도를 갖는다. 위작자는 눈앞의 물체를 모사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뇌가 지각한 것을 그린다. 이런 뇌의 착각을 수학적으로 계산하는 것은 원작과 위작을 과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사진=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분석 보고서]

또다른 위작의 근거로 내세운 '빛의 균형'도 차이가 명백하다.

감정팀에 따르면 화가는 작품 안에서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적절하게 배분하는데, 빛의 균형에 대한 지각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화가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이를 지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역시 측정할 수 있는 수학적 도구가 존재하는데, 휘도의 차이로 동일인의 작품 여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천 화백의 작품 9점의 휘도 표준 편차값은 21~34 사이에 분포하는 반면, 미인도는 45로 높게 나타났다.

감정팀은 이렇게 얻은 데이터를 함수로 계산한 결과 "미인도가 다른 작품들과 동일한 화가(천경자)에 의해 그려졌을 확률이 0.0002%"라고 밝혔다.

감정팀이 세 번째로 주목한 것은 눈 흰자위 부분의 채색 두께다.

칠해진 물감의 두께는 화가의 고유한 회화적 표현을 단적으로 나타내는데, 어떤 붓을 사용하며 색상의 강도와 안료의 희석 방식, 붓을 누르는 압력 등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감정팀은 설명했다.

"한없이 두텁게..." 천 화백의 채색 특징 과학적으로 입증

감정팀은 모든 분석 대상 작품에서 동일하게 표현된 부분이 눈동자 중 흰자위여서 가장 객관적인 비교가 가능하다고 지목했다.

감정팀은 흰자위 두께를 다중층간확대분석방법으로 측정했다.

이는 900나노미터(1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까지 측정 가능한 기술이다.

이를 통해 아주 작은 두께의 차이만으로도 빛이 통과할 수도 있고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감정팀은 설명했다.

안료의 두께가 두꺼우면 빛이 통과되지 못하고 반사돼 백색으로 보이고, 빛이 통과할 경우에는 회색이나 검정색에 가깝게 보인다.

이 분석 결과 미인도의 흰자위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채색이 얇은 것으로 나타났다.

천 화백은 생전 인터뷰에서 눈을 그릴 때 "한없이 오래 그린다"고 한 적이 있다.

여러 번 덧입혀 두텁게 그리는 것은 천 화백 작품의 특징 중 하나다.

그 동안 안목감정에 의존해왔던 채색의 두께를 과학적으로 수치화해 입증한 건 뤼미에르 감정팀이 처음 한 것이다.

뤼미에르 감정팀이 분석한 미인도와 천 화백 작품들의 눈 흰자위 두께 3D 그래프. 미인도의 경우 천 화백의 작품들에 비해 현저하게 두께가 얇은 게 나타난다. [사진=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분석 보고서]

감정팀은 이 방법으로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이 0.0006%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렸다.

뻬니코 CEO는 유족측과 전화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 검찰의 자체 과학수사 결과는 비과학적이고 비객관적이며 임의의 자료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 연구소의 25년 이상 축적된 첨단기술과 경험을 그렇게 쉽게 흉내낼 수 없다."

유족측 법률 대리인인 배금자 변호사(해인법률사무소)는 "뤼미에르 감정팀의 분석 기법은 전문가들의 '감'에 의한 안목감정이 저지르기 쉬운 주관적 판단을 완전히 배제해 객관적 분석이 가능하게 한 첨단 과학 감정 기술"이라고 말했다.

배 변호사는 "국제적 명성의 연구소가 한 달 이상 걸려 완성한 치밀한 연구 결과를 검찰이 고의적으로 배제한 것은 충격적인 일"이라며 "항고를 통해 미인도가 위작이란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유길용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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