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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사랑을 사랑했어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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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1930년대, 배우를 꿈꾸었으나 할리우드의 영화 에이전시에서 비서 일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보니. 그 여자 앞에 가능성 빼면 아무것도 없는 젊은 유대인 남자가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바비. 뉴욕에서 태어난 바비는 할리우드에서 거물이 된 삼촌의 에이전시에 일자리를 부탁하러 갔다가, 그의 비서인 보니에게 첫눈에 반한다. 솔직하고 다정한 그녀에게 기자 애인이 있다는 소리에 좌절하지만 얼마 후, 1주년 기념으로 루돌프 발렌티노의 러브레터를 줬지만 애인에게 차였다며 우는 보니를 달래다가 그녀의 마음을 빼앗는 데도 성공한다.


사랑에 빠진 그들은 미래를 약속한다. 결혼해서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작은 집을 얻고 행복하게 살아갈 날을 꿈꾼다. 비현실적인 베벌리힐스의 저택과 영화계 거물들의 이름이 흘러넘치는 할리우드에 환멸을 느낀 둘은 그렇게 의기투합한다. 바비가 ‘보니의 전 남자친구’가 실은 자신의 삼촌이라는 사실과 삼촌이 여전히 보니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삼촌이랑 결혼할 거예요? 나랑 할 거예요?”


[사랑에 빠진 남자의 무의식 구조]


우디 앨런의 영화 ‘카페 소사이어티’는 선택에 관한 영화다. 보통의 영화라면 남자 주인공의 이 질문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내면적 갈등이 세세히 그려질 것이다. 하지만 남자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이다. 여자의 대답이 심플한 것만큼이나! 여자는 ‘가능성’보다 ‘현실’을 선택한다. 그녀는 바비의 삼촌과 결혼한다.


선택의 다른 말은 배제다. 선택은 선택하지 않은 것을 감당하는 일이다. 선택은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기존에 성립된 자아가 분열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주인공의 내면과 자아는 ‘거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보여주지 않는다. 갈등을 일으키는 많은 요소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지나가고, 인물의 내면은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한 ‘플롯’으로만 작동한다.


가령 자신의 비서를 사랑하지만 25년 동안 흠결 없이 자신을 지켜온 아내를 버릴 수 없어 그녀와 한 약속을 몇 번이나 뒤집은 삼촌의 괴로운 심경은 바비에게 그의 정부가 실은 ‘보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가 자신의 조카를 향해 “나한테 신중함 가지고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인생에선 타이밍이 전부야!”라고 말할 때조차 그의 얼굴에선 괴로움이 도드라지지 않는다(스티브 커렐이 워낙 코미디 연기의 대가라 그런 것만은 아니다). 대신 그의 사무실 뒤 액자에 놓여 있는 보니의 1주년 선물, 즉 루돌프 발렌티노의 러브레터만이 바비의 눈에 띌 뿐이다.


내면이 아닌 표면을 훑는 ‘카페 소사이어티’는 불륜과 외도, 삼각관계를 다루고 있지만 조금도 심각하지 않다. 내레이션으로 스토리를 요약 정리하는 우디 앨런의 빠른 목소리와 배경에 흐르는 재즈 음악은 이해 불가의 세월 속에서도 시간은 잘만 간다는 진리를 경쾌하게 보여준다.


환멸을 느낀 바비는 미련 없이 뉴욕으로 돌아가 갱스터인 형이 운영하던 맨해튼 나이트클럽을 뉴욕 사교계 거물들의 명소로 만드는 데 성공하고, 아름다운 아내를 만나 아이까지 얻으며 성공의 정점에 선다. 물론 첫눈에 반한 아내의 이름이 ‘베로니카’ 즉 헤어진 보니와 같다는 건 프로이트를 비롯해 라캉, 지젝까지 ‘이건 너무 클리셰이지 않아?’라고 할 정도로 정신분석학 교과의 한 문장 같긴 하지만 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사랑에 빠진 남자가 파트너를 대하는 방식은 그가 어머니나 여동생에게 행동하는 것과 유사하다. 과거의 연인과 이름이 같다거나, 그녀가 쓰는 향수를 쓴다거나, 비슷한 안경을 썼기 때문에 낯선 여자를 욕망하는 남자는 의외로 많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처음 보는 여자는 이전의 다른 누군가로 쉽게 대체된다. 스스로 그것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그렇다. 그렇게 과거에 대한 무지는 우리를 종종 또다시 실패할지 모를 미래로 이끈다. 우리가 무수히 사랑에 실패하고도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고, 실패를 연달아 반복하는 건 이런 무의식의 작동 때문이다. 애초에 잘못 세팅된 기계 장치처럼 우리는 종종 무의식에 농간 당한다. 라캉의 권위자로 알려진 정신분석학자 ‘대리언 리더’는 자신의 책 『여자에겐 보내지 않은 편지가 있다』에서 이런 경향은 남자들에게 더 강하다고 말한다.


“여성지에서는 늘 남자들이 저항할 수 없는 여자가 되기 위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지 충고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진실은 더 기이하면서도 극적이다. 남자를 끌어들이는 힘은 거의 예측 불가능한 남성의 무의식적 구조에 달려 있다.”


얼핏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가벼운 버전처럼 읽히는 이 영화에서 바비와 보니는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다. 할리우드에 대한 환멸을 바비에게만은 스스럼없이 말하던 보니는 할리우드의 거물과 결혼해 과거에 자신이 비난하던 종류의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순수했던 시절을 확인하기 위해 바비를 만난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지금 옆에 있는 보니에 대한 미련을 떨쳐낼 수 없는 바비 역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과연 이들은 어떤 선택을 또다시 하게 될까.


[“매일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작정하고 가볍게 만든 ‘카페 소사이어티’ 같은 영화에 명대사가 많을 리 없지만, 우디 앨런의 표현대로 인생에는 인생만의 계획이 있다. 인간이 갈라파고스 거북이처럼 200년을 산다 한들, 우리가 그것을 알아낼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바비의 엄마가 쓴 편지에 나오는 이 이야기만은 한 번쯤 얘기하고 싶다. LA에 막 도착해 그곳에서 힘들게 고군분투 중인 아들에게 엄마가 보내는 편지 속 이야기 말이다.


“바비에게. 여긴 비가 와. 예쁘지만 우울해져. 레너드는 그런 게 인생의 비통함이라고, 인생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고, 그 무의미함을 자축해야 한대. ?내겐 좀 어려운 말이지만 엄마도 늘 그랬잖니.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그럼 언젠가는 그러려니 살아져.”


매일이 마지막인 것처럼 살아라! 이 말은 우리 시대의 영원한 잠언처럼 읽힌다. 하지만 바비 엄마의 입에서 나온 그다음 문장은 80년을 살아낸 노인이 우리에게 들려줄 법한 이야기 같아, 믿음이 간다.


“소식해라, 그래야 오래 산다! 젊음을 유지해라, 그래야 연애한다! ”


이런 말만 듣고 살다 보면, 어쩐지 나 자신이 온통 오답으로 가득한 노트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 아닌가. “그러려니 살아진다”는 말은 이때, 얼마나 적절한 말인가. 어떤 것은 지나가고, 어떤 것은 묻어두고, 어떤 것은 잊힌 채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정서는 말할 것도 없이 ‘회한’이다. 회한이란 이루지 못한 사랑 끝에 오는 가장 강렬한 감정이다. 시간은 많은 것을 바꾼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도, 직업도, 마음도, 그 모든 것들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 결코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나는 그것이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환상, 즉 ‘사랑을 사랑하는 일’인 것 같다. 한때의 약속보다, 정절보다, 신념보다 더 오래, 끈질기게, 우리의 마음속에 남아 무수히 많은 미래의 사랑을 실패로 이끌게 할 바로 그것. 바비에게 보니는 끝내 그런 존재로 남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현실을 선택하는 순간, 그 환상은 여지없이 깨져버릴 테지만. ●


백영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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