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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 퇴출의 교훈과 과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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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호 2 면

국내 1위, 세계 8위 해운사인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채권단이 지난달 30일 만장일치로 자금 지원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부채비율이 1000%를 넘는 데다 자산보다 빚이 훨씬 많아 회생보다는 퇴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후유증은 작지 않다. 이미 해외 채권자가 배를 압류하고, 일부 구간의 운임이 급등했다. 99척의 배로 세계 74개 노선을 누벼온 대형 해운사의 사실상 퇴출은 앞으로도 수출입과 전체 물류에 상당한 영향을 줄 것이다. 부산 등 항만도시에선 한진해운 퇴출에 반대하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그럼에도 채권단의 이번 결정은 평가할 만하다. 무엇보다 대마불사(大馬不死)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분명히 천명됐다. 회생이 불가능한 기업은 규모와 상관없이 솎아내는 게 구조조정 원칙과 시장원리에 맞는다. 이런저런 핑계로 국책은행 자회사가 돼 혈세를 갉아먹는 ‘좀비 기업’이 100개를 넘는다. 예외 없이 ‘세금 먹는 하마’이자 ‘낙하산 천국’이 됐다. 국민적 골칫덩이가 된 대우조선해양이 대표적이다. 경영 실패를 정부가 떠받쳐주고 대마(大馬)는 죽이지 않을 거라는 맹신이 이번 결정으로 깨졌다. 기업의 생존은 기업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이 받아들여져야 구조조정 대상 기업도 줄어든다.


한진해운을 이 지경으로 만든 것은 무능하고 안이했던 대주주였다. 최은영 전 회장은 경기 변동을 읽지 못하고 무리한 용선계약과 사업 확장으로 부실을 자초했다. 그러면서 배당과 급여로 수백억원을 챙겼다. 자율협약 직전 보유 주식을 팔아 수십억원의 손실을 회피했다. 대주주의 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철저히 비켜갔다. 2014년 경영권을 넘겨받은 한진그룹도 한진해운을 살려야겠다는 의지와 자금력이 부족했다. 부실이 더 컸던 현대상선과의 운명이 결정적으로 엇갈린 것도 대주주의 자구 노력에서의 차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구조조정을 질질 끌어온 정부 책임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해운업이 불황에 빠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큰 그림을 갖고 산업경쟁력을 높일 방안을 내놓지 못했다.


산업지형을 바꿀 인수·합병이나 매각보다는 대주주와 회사의 자력 갱생을 통한 현상 유지를 추구해왔다. 중소기업 지원에 전념해야 할 신용보증기금을 동원해 한진해운 채권을 사주기까지 했다. 선제적이고 신속한 구조조정은 말뿐이었다.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지지 않았다면 채권단이 이런 결정을 내렸겠느냐는 지적을 아프게 들어야 한다.


문제는 앞으로다. 한진해운 법정관리로 정부는 두 가지 숙제를 안게 됐다. 국가 경제에 미치는 파장을 최소화하고 기간산업인 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찾는 일이다. 현대상선이 한진해운의 우량자산을 인수하는 방안을 정부가 추진하기로 한 것은 현실적이고 유일한 방안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퍼지고 있는 법정관리 파장을 조기에 차단하지 않으면 말짱 헛일이다. 한진해운 선박에 대한 압류와 입항·하역 거부가 잇따르고 있다. 방치하면 배는 물론 수십 년간 구축한 노선과 항만, 인력 같은 네트워크까지 와해될 수 있다. 한진해운이라는 회사는 없어져도 해운업 핵심 자산은 보존하겠다는 계획도 무산된다.


한진해운의 운명을 결정할 법원과 정부의 2인3각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정부는 물류 혼란을 조기에 수습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또 한진해운 해외 화주와 선주를 안심시키기 위한 총력전을 벌여야 한다. 법원도 성급한 청산은 피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산보다 빚이 많아 자칫 빚잔치로 회사가 공중분해될 위험이 크다. 남은 자산을 경쟁입찰로 매각한다면 해외 경쟁 해운사를 돕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한진해운 법정관리가 해운 구조조정의 끝은 아니다. 오히려 시작이라고 봐야 한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이어져온 양대 해운사 체제가 현대상선 독주체제로 개편되게 됐다. 하지만 대우조선처럼 산업은행 자회사로 안주해선 미래가 없다. 세계 15위권인 현대상선의 규모와 경쟁력을 함께 키워야 한다. 이를 위해선 세계 경제와 업종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할 능력 있는 경영진이 필요하다. 실력 위주로 평가하고 보상하는 시스템도 만들어져야 한다. 정치권의 외압과 낙하산에 더 이상 휘둘려선 안 된다. 한진해운 퇴출이 결과적으로 잘한 일이었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정부와 채권단, 법원이 지혜를 모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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