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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활용 못하는 여론조사, 이래도 계속할 건가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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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5호 2 면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는 4·13 총선 열흘 전 “130석도 간당간당하다”는 보고를 받고 비상대책회의를 소집했다. 휴대전화를 활용한 당내 여론조사 결과에 따른 것이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들도 같은 무렵 “120석은 가능할 것”이라고 사석에서 말하곤 했다. 역시 휴대전화를 쓴 당내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국민은 전혀 몰랐다. 언론도 몰랐다. 새누리당은 160석이 거뜬하고 더민주는 100석도 힘들 것이란 말이 공공연히 돌아다녔다. 하지만 개표 결과는 전혀 달랐다. 새누리당은 더민주에도 못 미치는 122석에 그쳤다. 오세훈·이재오 후보 등 “10%포인트 이상 압승할 것”으로 점쳐졌던 후보들이 줄줄이 참패했다.


4·13 총선은 특히나 여론조사로 시작돼 여론조사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야는 여론조사를 기준으로 공천과 컷오프 대상을 정했고 선거 캠페인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진행했다. 언론 역시 매일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를 경마식으로 중계하며 판세를 점치기 바빴다.


총선 기간 중에도 여론조사의 오류와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제기됐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같은 지역구 조사 결과가 어떤 건 접전이고 어떤 건 특정 후보가 오차범위를 크게 넘어 이기는 것으로 집계된 게 허다했다. 한 지역구에서 같은 날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동일 후보의 지지율이 20%포인트 넘게 다르게 나타난 경우도 있었다. 응답률이 3~5%에 불과해 신뢰도가 바닥 수준인 자동응답시스템(ARS) 조사도 버젓이 여론조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판세 예측의 자료로 쓰였다. 후보와 조사업체가 결탁해 특정 후보에게 유리한 쪽으로 여론조사를 유도하거나 여론조사를 하지 않고도 한 것처럼 허위 분석보고서를 선관위에 제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부정확한 조사 결과가 정당의 공천 결과를 좌우하고 표심을 출렁이게 한 것이다. 유권자의 판단을 돕기 위한 여론조사가 오히려 경선과 선거의 정당성을 뒤흔드는 폭탄이 돼버린 셈이다.


여론조사가 이렇게 엉터리가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휴대전화를 통한 여론조사를 막아놓은 데 있다. 사실상 모든 국민이 휴대전화를 갖고 있고, 유선전화를 보유한 가구는 갈수록 주는 마당에 유선전화만으로 여론을 측정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런데도 현행법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휴대전화 안심번호’를 이동통신업체가 오직 정당에만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지난 1월 여야가 정당만이 안심번호를 이용해 여론조사를 할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집전화를 통한 조사가 고령층과 주부에게 치우치게 되자 여론조사 기관들은 지역별·성별·나이별 가중치를 부여해 예측 조사를 해왔는데 이번 총선을 통해 이런 방식이 명백한 한계를 드러냈다. 휴대전화를 활용하지 않은 여론조사는 더 이상 여론조사로 인정할 수 없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다. 여론조사 방식을 현실에 맞게끔 대대적으로 손보지 않으면 다음 선거에서도 엉터리 조사로 인한 여론 호도와 혼선, 또 여론조사를 가장한 불·탈법 여론 조작 범죄는 급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대 국회는 문제투성이 여론조사 방식을 손보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휴대전화 정보를 활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개인정보 보호를 엄수한다는 전제 아래 공인된 언론사가 공익을 목적으로 실시하는 여론조사는 안심번호를 쓸 수 있도록 관련 법규가 개정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론조사는 유권자들의 눈을 가리고 표심을 오도하는 스포일러가 될 것이다.


선거 1주일 전부터는 여론조사의 공표와 보도를 금지하는 ‘블랙 아웃’ 제도도 개선돼야 한다. 여론 흐름을 알지 못해 1주일간 ‘깜깜이’로 지내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돌아다니는 흑색선전에 현혹될 수밖에 없는 한국 유권자와 달리 미국 등 선진국들은 선거 하루 전까지 여론조사 보도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다. 유권자들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다. 여론조사 심의기준을 강화해 응답률이 낮거나 부정확한 조사는 엄격히 쳐낸다는 전제 아래 선거 전날까지 여론조사 공표를 허용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


여론조사의 과학성을 높이는 것 못지않게 시급한 것은 정치권이 늘 민심의 흐름에 귀를 열어두는 ‘열린 정치’다. 여론조사 기관이 가져다주는 보고서에 일희일비할 게 아니라 여론과 민심을 피부로 느낄 수 있도록 유권자들과 수시로 소통하는 게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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