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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트럼프, 그리고 박근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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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그가 거기 있어도 나는 그가 그립다. 언제나 사람 좋은 웃음을 짓는 그를 볼 때면 나도 몰래 슬며시 따라 올라가던 입꼬리. 누가 볼세라 표정을 도로 고치곤 하던 쑥스러운 기억도 머잖아 옛일이 되어 버릴 게다. 어느새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몇 년 새 주름과 흰머리가 부쩍 늘었지만 내 마음은 터럭만큼도 흔들리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대의를 위한 수고와 고뇌, 그로 인한 불면의 밤들을 보여 주는 흔적일 테니 되려 귀하게 여길 따름이다.

어디 내놓기 남부끄러운 대통령 갖게 된 두 나라 딱해
두고두고 그리워할 지도자 가질 자격, 충분하지 않나

짐작하셨는지 모르나 해가 바뀌면 자리에서 물러날 버락 오바마 얘기다.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이리 연서에 가까운 송사를 바친다고 너무 흉잡지 마시기 바란다. 하루라도 빨리 이별하고 싶은 우리나라 대통령과 달리 그를 보내는 건 아쉽기 그지없는데 어쩌겠나. 더욱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후임자가 도널드 트럼프란 걸 생각하면 바다 건너 미국 국민들과 동병상련까지 느낄 지경이다. 트럼프 그룹의 경영진인 아들·딸과 사위가 막후 실세로 국정마저 좌지우지할 게 불 보듯 뻔해서다. 거기다 당선되기 무섭게 해외 사업 파트너들을 두루 불러 만나질 않나, 내각에 트럼프 그룹과 이해관계가 얽힌 투자은행 출신들을 여럿 꽂아 놓질 않나…. 나랏일과 돈벌이가 구분 없이 뒤섞일 가능성이 농후하니 조만간 미국판 국정 농단 게이트가 벌어져도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어디다 내놓기 참 남부끄러운 대통령을 갖게 된 두 나라의 딱한 처지를 비관하다 보니 오바마의 가치가 새삼 빛나 보일 수밖에. 물론 그라고 왜 허물이 없었겠나. 우유부단한 리더십 탓에 시리아 내전이며 북핵 사태 같은 난제들을 덮어두기에만 급급했다는 비난이 대표적이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으로서 화해와 통합의 시대를 열지 못하고 더욱 분열된 미국 사회를 초래한 것도 뼈아픈 대목이다. 매사에 ‘반(反)오바마’를 외친 트럼프가 대선 승리를 거머쥔 것 자체가 오바마가 모든 미국인의 대통령이 되는 데는 실패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오바마가 재임 중 보여준 미덕들은 두고두고 그리울 것 같다. 한 점의 비리 의혹도 허용치 않은 청렴함이 첫째요, 그 다음은 남다른 유머감각이다. 최근 뉴욕타임스에 실린 ‘코미디 최고사령관(Comic in Chief)에게 보내는 작별인사’란 칼럼에선 오바마가 특히 자학 개그에 뛰어난 점을 높게 샀다. 얼마 전 그가 퇴임을 앞두고 새 일자리를 찾아 나선 설정으로 방송된 토크쇼의 한 장면만 봐도 그렇다. “뭐 쓸 만한 기술이라도 가진 게 있습니까?”(면접관), “노벨평화상을 타긴 했는데요.”(오바마), “그 상은 뭘로 받은 거죠?”(면접관),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오바마) 취임 후 불과 열 달 만에 별 업적도 없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며 불거졌던 논란을 능청맞게 ‘셀프 디스’한 거다.

이렇듯 ‘웃기는 대통령’에 연연하는 건 유머가 요즘 시대에 가장 잘 먹히는 소통의 도구라 여기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노변정담’이란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처럼 오바마는 코미디로 민심과 통하려 애쓴 거다. 그렇다면 왕년의 리얼리티 쇼 스타였던 트럼프의 유머 수준은 어떨까. 한마디로 꽝이다. 미국 NBC방송의 시사 풍자 코미디쇼 SNL에서 트럼프 역을 맡은 배우가 테러단체 IS가 뭔지 몰라 검색하는 장면이 나오자 즉각 이런 비판 트윗을 날렸을 정도다. “못 봐주겠다. 재미 하나도 없다. 연기도 최악이다!” 하기야 한국판 SNL이 자신을 욕쟁이 캐릭터로 풍자하자 괘씸죄로 해당 그룹 부회장을 물러나라고 압박한 우리 대통령에 비하면 그나마 양반일 까.

언젠가 초등학생인 지인의 딸이 오바마가 물러난다는 뉴스를 보다가 “미국 대통령 그만두면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오면 안 되나요?”하더란다. 못난 대통령 둔 탓에 대선은 빨리 치르게 됐는데 “도무지 찍을 사람이 안 보여 고민”이란 푸념들을 듣고 있자면 나 역시 절로 품게 되는 희망사항이다. 가망 없는 넋두리는 이쯤에서 집어치우고 현실적인 기대를 밝히자면 다음엔 자랑스럽진 않아도 최소한 부끄럽지 않은 대통령을 갖고 싶다. 물론 오래오래 그리워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면 더 좋겠고. 이제 우리 국민에겐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않은가.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