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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작자도 흉내낼 수 없는 수준"…미인도 진품 결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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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간 위작 논란이 이어진 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검찰의 결론이 나왔다. 1991년 천 화백이 "내가 낳은 자식을 몰라 볼 수 없다"며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한 뒤 시작된 공방이 일단락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 위작을 했다는 인물(권춘식씨)까지 등장했지만 검찰의 최종 판단은 달랐다. 특히, 유족들의 요청으로 프랑스에서 온 뤼미에르 감정단의 결과도 검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뤼미에르 감정단은 지난 10월 “진품일 가능성은 0.00002%”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천경자(1924∼2015) 화백의 그림 `미인도`.  [출처: 중앙일보] 검찰,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 `진품` 결론

천경자(1924∼2015) 화백의 그림 `미인도`.

검찰이 진품이라는 결론을 낸 근거는 서너개로 요약되는데 스스로 위작을 자처했던 권춘식씨의 발언도 결정적인 근거였다.

위작자를 자처한 권씨는 "나로서는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작품 수준"이라며 앞서의 주장을 번복했다. 검찰이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보여주자 실제 작품을 처음 본 권씨가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 배용원)는 19일 “미인도의 ▶소장 이력 조사 ▶전문기관의 과학 감정 ▶전문가의 안목 감정 ▶위작자를 자처한 권씨에 대한 조사 내용을 종합한 결과, 미인도는 진품이다”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다른 진품 근거는 국가기록원에서 확보한 미인도의 소장 이력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1977년 천 화백은 대공 대구분실장 오모씨에게 그림 2점을 제공했는데 이 중 하나가 미인도였다. 그림은 오 모씨의 아내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아내에게 선물하면서 김 전 부장의 응접실에 전시됐다. 계엄사령부의 기부재산처리위원회 공문에 고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서울 성북구 보문동 자택에서 천 화백의 미인도가 국가에 기부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검찰은 "미인도가 재무부ㆍ문화공보부를 거쳐 1980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입고된 이력이 명백히 파악된다"면서 위작일 가능성은 없다고 밝혔다.

검찰은 과학적인 감정 결과도 제시했다.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압인선(날카로운 필기구 등으로 사물의 외곽선을 그린 자국)이 대표적이다. 미인도 속의 꽃잎과 나비 등에는 천 화백이 다른 작품에서도 사용한 압인선이 나타났다. 위작자 권씨는 사용하지 않는 기법이었다.

천 화백의 독특한 채색 기법도 미인도에 나타났다. 수정과 덧칠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에 그림 밑층에 숨겨진 ‘다른 밑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짧은 시간 내에 만들어내는 위작에서는 보통 발견되지 않고, 천 화백의 ‘청춘의 문’(1968년) 등에 이런 밑그림이 나타난다고 검찰은 설명했다. 수사팀 관계자는 "대검ㆍ국과수ㆍ카이스트의 디지털 영상분석에서 미인도의 밑그림을 발견했으며, 이는 천 화백의 비공개 작품인 ‘차녀 스케치’(1976년)와 상당히 유사하다"고 말했다.

미인도가 위작이라고 주장해 온 천 화백의 유족 측은 즉각 반발했다. 유족 측 배금자 변호사는 "프랑스 뤼미에르 감정단이 작품을 촬영해 1650개 단층을 분석한 결과 미인도는 ‘장미와 여인’을 보고 제작한 위작이라는 결과가 나왔다.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뤼미에르 감정단은 ‘모나리자’ 작품 표면 아래에 숨겨진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 명성을 얻은 감정단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뤼미에르 감정단의 보고소에는 1650개 단층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 내용이 들어있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또 "이 감정단이 제시한 비교 방법을 진품에 이용하면 진품일 가능성이 약 4%에 불과하다"며 비교 방법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미술계는 ‘당연한 결과’라고 반기는 분위기이면서도 고 천경자 화백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박우홍 한국화랑협회장은 "결론으로 가는 과정이 시끄러워서 일반인이 고인의 작품세계를 깎아내릴 소지가 있다"고 우려했다. 송향선 한국미술품감정평가위원 감정위원장은 "치밀한 역추적과 광범위한 전문가 의견 청취 등 이번 검찰 조사가 한국 미술품 위작 사건의 한 모범 사례가 됐다"고 평가했다.

◇미인도 위작 사건 =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씨가 지난 4월 바르토메우 마리 국립현대미술관장 등 6명을 사자명예훼손·저작권법 위반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이 미인도를 진품으로 판단하면서 마리 관장 등 피고소인 6명 중 5명은 무혐의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국과수 등에서 진품으로 결론지었다고 주장한 현대미술관 전 학예실장 정 모(59)씨는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정재숙ㆍ송승환 기자 song.se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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