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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디·기사·매니저로 헌신 너무 간섭하면 되레 역효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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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25면

김보경(오른쪽)의 캐디를 맡고 있는 김정원씨는 대표적인 ‘생계형 골프 대디’다. 그는 심장병과 관절염 후유증으로 힘들어 하면서도 12년 동안 딸과 함께 필드를 누볐다. [중앙포토]

“리디아 고의 부모는 언제 자야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까지 일일이 말해준다. 골프에 대해 잘 모르는 리디아 고의 아버지는 딸의 스윙에 대해서도 참견했다.”


세계적인 골프 교습가 데이비드 레드베터(미국)가 여자골프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19·뉴질랜드)와 최근 결별했다. 말이 좋아 결별이지 사실상 해고 통보를 받았다. 자존심 강한 레드베터가 헤어지면서 쓴소리를 했다. “리디아. 너의 인생, 너의 골프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는 부분을 늘려야 한다.”


리디아 고의 아버지(고길홍)는 한국인이다. 한때 ‘천재 골프소녀’ 소리를 듣던 미셸 위(27·미국)의 아버지(위병욱)도 한국인이다. 미셸 위도 아버지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천재성과 의욕이 시들었다는 말을 듣는다.


지난 3월 싱가포르 공항에서 전인지(22)가 에스컬레이터에서 굴러내려온 짐가방에 맞아 허리를 다쳤다. 짐가방의 주인이 ‘라이벌’ 장하나(24)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갈등과 억측이 일파만파 확대됐다. 전인지와 장하나 측 모두 상처를 입었다.


‘골프 대디’는 한국의 독특한 엘리트 골프 문화를 상징하는 단어다. 한국 골프(특히 여자)가 세계 정상에 오른 데에는 골프 대디들의 희생과 헌신이 큰 몫을 했다. 박세리·박인비·신지애 등 세계 정상을 경험한 선수들 뒤에는 골프 대디들이 있었다. ‘고보경’의 재능을 읽어내고 뉴질랜드로 이민 가 체계적인 훈련과 관리를 통해 세계랭킹 1위 ‘리디아 고’를 만든 것도 아버지였다.


자식의 성공이 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핏줄 의식, 부지런함과 집요함이 코리언 골프 대디의 특징이다. 반면 글로벌 에티켓과 매너가 부족해 이런저런 해프닝을 일으킨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이제 그 공과를 냉정하게 따져볼 때가 됐다.


골프전문채널 JTBC골프에서 해설을 맡고 있는 임경빈 위원은 미국에서 20년간 살면서 미셸 위의 부침(浮沈)을 지켜봤다. 임 위원은 “미셸 위가 성적이 나빴을 때 현지 기사나 댓글을 보면 ‘이번에도 아버지가 와서 간섭하는 바람에 망쳤다’ ‘제발 부모가 미셸 위를 놔 줘라’는 내용이 많았다. 3년 전쯤 미셸 위가 슬럼프를 겪고 있을 때 경기를 보니 그린에서 포 퍼터를 하는 등 성의 없이 치더라. 화가 잔뜩 나 있는 거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었다. 자꾸만 뭐라고 하니까 ‘그럼 내 맘대로 칠게’ 하면서 80타 가까이 쳐 버린 것이다.”


임 위원이 재미있는 분석을 해 줬다. 스타 골퍼의 자제들이 대부분 아버지보다 골프를 못 친다는 것이다. “잭 니클라우스 아들 둘이 모두 골프를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자니 밀러, 리 트레비노 등 쟁쟁한 전설들의 2세도 잘 된 경우가 없다. 왜 그럴까. 자기들이 답답한 마음에 아이들 스윙에 손을 댄 거다. 본인이 잘 치는 것과 아들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건 별개다.”


흔치 않은 세계 정상급 부자(父子) 골퍼가 제이 하스(63)와 빌 하스(34)다. 그런데 두 사람의 스윙이 전혀 다르다고 임 위원은 설명했다. “제이 하스는 아들을 전문 교습가에게 보내고 전혀 터치를 하지 않았던 거다. 이처럼 선수와 교습가는 전혀 다른 영역이다. 세계적인 선수도 이런 판인데 보기 골퍼가 프로인 자식을 가르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스윙 폼 등 결정은 전문가에게 맡겼어야”]

LPGA에서 뛰고 있는 최운정은 아버지 최지연씨(왼쪽)를 절대적으로 의지한다. [중앙포토]

임 위원은 리디아 고도 미셸 위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했다. “스윙 폼을 살짝만 바꿔도 차이가 확 나는 게 골프다. 그런데 리디아는 스윙 코치·캐디·클럽을 다 바꿨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딸이 지난해보다 비거리도 줄고, 그린적중률도 크게 떨어진 걸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사람 저사람 얘기 들었을 수 있다. 하지만 결정은 전문가에게 맡겼어야 한다.”


임경빈 위원과 함께 JTBC골프 해설을 맡고 있는 박원 프로는 전인지의 스윙 코치 겸 멘탈 트레이너다. 전인지는 박 위원을 “스승님”이라고 부를 정도로 절대 신뢰한다. 전인지는 올해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신인상을 받았고, 리디아 고와 마지막 대회 마지막 홀까지 접전을 펼친 끝에 베어트로피(최소타수상)도 거머쥐었다.


박 위원은 “한국 골프 발전에 골프 대디의 역할이 컸지만 동시에 부작용도 많았다”고 했다. 그는 “프로 선수의 부모라면 이만큼 오기까지 얼마나 몸고생, 마음고생이 많았겠나. 그 과정에서 평판에 흠이 될 수 있는 일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부모들끼리 만나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깎아내리고 흠을 잡으려 할 때가 많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으면 ‘내가 어떻게 얘를 키웠는데’ ‘얼마나 소중한 자식인데’라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다. 해외 나가서 부모끼리 만나면 서로 외면하거나 영혼 없는 인사만 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박 위원은 “해외 경기에 부모들이 따라 나가려고 하는데 그게 선수들에게 짐이 된다”며 전인지 사례를 들려줬다. “LPGA에서 뛰는 다른 나라 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은 골프는 잘 치는데 놀 줄 모른다’고 한다. 놀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부모들 때문에 어울리지를 못할 뿐이다. 얼마 전 선수들 모임에 인지가 초청을 받았다. 인지가 술은 잘 못하지만 끝까지 어울리니까 ‘너희도 놀 줄 아네’라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투어를 뛰는 선수들이 오히려 부모의 통역을 하고, 혹시 엉뚱한 실수를 하지나 않을까 신경을 쓰는 바람에 경기력에도 영향을 받게 된다.”


박 위원은 “지난 7월 US여자오픈이 끝난 뒤 전인지 아버지를 만나 이런 얘기를 했더니 ‘우리가 애한테 짐이 되는 것 같다. 보고 싶을 때만 한 번씩 오고 자리를 비키겠다’고 하셨고 약속을 지켰다. 이후 전인지가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메이저 최소타로 우승하는 등 승승장구했다”고 소개했다.


골프 대디의 양태도 다양하다. 사업체나 직장을 접고 자식에게 올인하는 부류도 있고,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운전 기사나 캐디 역할을 하는 ‘생계형’도 있다.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신인상을 차지한 이정은(20·한국체대)의 아버지 이정호씨가 대표적인 생계형 골프 대디다.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이씨는 장애인용 승합차를 구입해 딸의 기사 노릇을 했다.

[골프 문외한 김보경 아버지 12년째 캐디역]
김보경(30)의 아버지 김정원(61)씨는 12년째 딸의 캐디를 맡고 있다.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던 김씨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수술을 받았고, 그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다. 김보경은 유명 코치에게 레슨을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근성과 노력만으로 프로가 된 김보경을 위해 아버지가 운전기사 겸 캐디 역할을 자청했다. 김씨는 골프를 한 번도 쳐본 적이 없다. 심장병에다 관절염까지 앓은 그는 딸을 위해 20kg이 넘는 캐디백을 메고 절뚝이며 코스를 오르내렸다. 끊임없이 싸우고 티격태격한 12년 세월 동안 김보경은 4승을 올렸고, 국내 선수 중 최다인 247개 대회에 출전했다.


김보경은 “전문 캐디에게 맡겨보려 했지만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가 낫더라”고 했다. 김씨는 “딸이 ‘그만두세요’ 하면 언제든 그만둘 거다. 요즘 골프 대디들이 문제라고 하는데 99% 아빠들은 자식을 위해 고생하고 열성적으로 뒷바라지 할 뿐이다”고 말했다.


이정은·왕정훈(리우올림픽 남자대표) 등을 가르친 박영민 한국체대 교수도 ‘아빠 캐디’의 효용성을 인정했다. “골프 이론이나 실력은 당연히 떨어지지만 아이의 성격·습관 등을 아버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나. 결정적인 상황에서 전문 캐디는 클럽이나 샷 선택에서 결정을 못 해줄 때가 많다.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선수들도 모든 걸 다 해주는 아빠가 편한 거다. LPGA에서 뛰는 최운정(26)이 ‘우승하면 아빠를 쉬게 해 드리겠다’고 해놓고 우승 뒤 몇 대회 부진하자 다시 아버지에게 캐디백을 맡긴 것도 그런 이유다.”

박 교수는 골프 대디의 긍정적인 면도 많다고 했다. 대학 대회에 나가 보면 부모와 함께 온 선수는 골프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다르다고 한다. 부모가 챙겨주고 신경을 쓰면 확실히 성공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문제는 ‘자율성’이다. 박 교수는 “선수들이 초-중-고 엘리트 코스를 거치는 동안 모든 것을 부모가 나서서 해 준다. 아이는 스스로 뭔가를 하는 능력을 키울 수가 없다. 친구나 선후배를 대하는 사회성, 선생님과 어른에 대한 예절 등 기본적인 것도 배우지 못한 채 ‘스윙 머신’으로 키워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부모들이 뒷바라지 하는 건 좋지만 아이가 자생력을 갖도록 해 주고 어느 시기가 되면 뒤로 빠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제섭(57) 씨는 신지애(28)를 키운 골프 대디다. 그는 딸이 세계랭킹 1위를 달성한 2010년 이후 필드에서 발을 끊고 지금은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신씨는 한 인터뷰에서 “‘아빠가 손을 놓고 내가 알아서 하니까 골프가 더 즐겁다’고 지애가 말했다죠. 흐뭇했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했어요”라고 털어놨다. 그게 아빠 마음이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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