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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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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혜민 기자 중앙일보 팀장
박혜민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산업부장

박혜민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산업부장

“엄마, 이 사람들 정말 멋진 거 같아.”

촛불을 든 중학생 딸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도 이 사람들 중 한 명이야.”

아이의 얼굴은 자랑스러움으로 빛났다. 촛불은 덕수궁 돌담길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사람들의 손에 들린 촛불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욕을 하거나 과격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열을 이끄는 목소리는 어설펐다. 그 목소리가 ‘박근혜는 퇴진하라’ ‘새누리당 해체하라’ 같은 구호를 외치면 따라 하기도 하고, 목소리가 안 들린다 싶으면 대열 중 누군가 자연스럽게 구호를 시작했다. 행렬을 이룬 사람들은 분명 동네 마트나 골목에서 한 번쯤 마주친 가족·연인·친구 같은 평범한 얼굴이었다.

그 다음주에도 딸아이는 내 손을 잡고 광화문으로 갔다. 광장에 모인 사람의 수는 더 많아졌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시위는 평화로웠다.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사람들 뒤에서 커다란 봉투를 들고 다니며 조용히 쓰레기를 줍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딸은 “정말 착하신 분”이라며 감탄했다. 돌출 행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제지로 곧 잠잠해지곤 했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그 자리에 아이와 함께해도 되겠다고 생각한 건 법원이 내자동 인근까지의 행진을 허용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학교에서 준법정신을 배우는 아이와 불법 시위에 참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불법 행진을 막으려는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가능성 때문에 어린 딸을 데려갈 결심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90년대 초 대학을 다닌 내가 기억하는 집회와 시위는 폭력으로 얼룩져 있었다. 경찰은 저지하고, 학생들은 불법이 된 시위를 강행하면서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번에 법원의 결정은 달랐다. “해당 집회·행진은 청소년·어른·노인을 불문하고 다수의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국민이 스스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집회에 참여하는 이상 조건 없이 허용하는 게 민주주의 국가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며 행진을 허용했다. 7번에 걸쳐 이어진 평화 시위는 국민 스스로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임을 증명했다. 광화문광장에 놓인 세월호 구명조끼 304개는 우리가 2년 전의 참사를 잊지 않고 있다고 말해줬다. 대통령을 비롯한 어른들의 부끄러운 모습에 실망했을 아이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을 안겨줄 수 있어 정말 다행이다. 아이 손을 잡고 촛불시위에 참여할 수 있게 해준 법원의 결정에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평화 시위를 지켜낸 우리들에게도.

박혜민 코리아중앙데일리 경제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