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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황석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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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드디어 조양을 점령했구나.
덕이는 큰한의 높직한 의자에 앉아 감개무량하여 중얼거렸다. 청구의 북방 변방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와 드디어는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인근 수백여리의 청구의 평화스런 마을 연합들을 차례로 파멸시켰던 사나운 적들의 본거지를 이제 막 점령한 것이다. 덕이가 영막 안에 들어가 앉자마자 청구의 선비군들 중에 홀이가 거느리는 친위 중군 병력들이 영막을 둘러쌌고, 전사들은 창검을 치켜들고 영막 안으로 들어와 덕이의 좌우에 시립했다. 홀이 먼저 들어서고 뒤이어 상 다루가 들어섰다. 홀이 아뢰었다.
조양은 완전히 평정되었읍니다. 이제 남은 일은 날이 새자마자 인근에 흩어진 가족들을 모으는 일과 적의 병장기며 식량을 간수하는 일이 남았을 뿐입니다.
포로는 어찌 되었는가?
지금 부상자와 생포된 자들과 부녀자들을 구분하여 밖에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홀이 대답하였다. 다루가 덧붙였다.
그뿐 아니라 밝 종족으로 이곳에 끌려와 있던 사람들을 따로 가려내고 있읍니다.
덕이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중에서 청구의 갈래강 어름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고싶다.
물론입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한의 혈족들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곧 그들을 찾아내어 이리로 데리고 올것입니다.
다루가 말하자마자 밖에서 군사 두 사람이 달려 들어오더니 홀에게 알렸다.
찾았읍니다. 예전 갈래성 마을의 큰돌수장의 혈족되는 사람들이 지금 밖에와 있읍니다. 덕이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스스로 자제하려는듯이 다시 의자에 두 팔을 얹고 스스로 주저앉았다. 영막 안에는 관솔 불빛이 훤하게 밝혀져 있었다. 휘장사이로 군사들의 안내를 따라서 들어오는 남녀가 보였다. 소년들이 두사람, 그리고 여자도 둘이었다.
하나는 아낙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녀였다. 그들은 모두 소매없는 털가죽 옷을 입었고 맨머리를 가죽끈으로 두르고 있었다. 아낙은 두 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하나는 제 어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졸 따라왔으며 아기가 팔안에 안겨 있었다. 덕이는 첫눈에 그 아낙이 아름인 것을 알아보았다. 반가움과 회한으로 그의 가슴은 곧 터져버릴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욱 덕이는 자리에서 일어날수도 말을 꺼낼수도 없었다.
청구의 한이시다. 예를 올리라.
곁에 섰던 다루가 나직하게 일행들에게 말하였다. 그들은 예전 청구의 법식대로 세번 큰걸 뒤에 여섯번 허리를 굽히는 인사는 잊어버리고, 다만 유목부족의 격식대로 두팔을 벌려 비어있음을 보이고나서 다시 팔을 제 가슴팍에 엇갈려 모으고 무릎을 굽혀 고개를 숙이는 예를 보였다. 덕이는 절을 하고 무릎을 꿇은채 고개를 드는 두소년들이 아우인 것을 알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앞에 앉은 동호의 정복자가 옛날 갈래 마을의 어린 전사이던 덕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덕이가 조용하게 물었다.
너희들은 분명히 청구족 사람들인가?
네 그렇습니다.
앞의 두 아우 중에 큰것이 대답했다. 덕이는 짐짓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어찌 동호의 격식으로 예를 올리는가?
그들은 당황하여 서로를 마주보는데 아이를 안은 아낙이 뒷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예법을 알 즈음에 이곳에 끌려왔기로 삼육의 예는 알지만, 아우님들은 어릴적에 왔기로 청구의 풍습은 배운바 없읍니다.
덕이는 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아름이에게 다짜고짜 들이댔다.
아우님들이라면 친 동기간들인가?
아닙니다.
하고나서 아름이는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면서 간신히 답하였다.
저는 이곳에 끌려오기 전에 청구에서 혼례를 올린 남편이 있었읍니다. 여기 세 사람은 제 시누이·시동생들입니나.
그 남편이란 자는 어디 있는가? 아름이가 미처 대답을 못하는데 큰 동생이 말했다.
오래 전에 헤어져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합니다. 한께서 우리를 동호의 무리에서 건져주셨으니 우리는 이제 청구의 백성입니다. 저희 형수께는 더 이상 묻지 마십시오. 우리 형제는 여기서 어머니처럼 믿고 살았읍니다.
덕이는 그러나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아무리 끌려왔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누구의 자식인가?
둘 다 내 자식이며 청구의 혈족입니다. 하나는 헤어진 남편이 태중에 남겨준 자식이고, 이 어린 것은 여기 와서 우리 식솔을 돌보아준 동호 사람의 자식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아이도 청구의 아이로 키우겠읍니다. 반은 내것이니까요.
아름이가 분명하고 정연하게 말하였다. 곁에 섰던 다루와 홑은 숨을 죽이고 다음을 기다렸다. 덕이가 의자 위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허리에 찬 동검을 빼어 위로 높이 치켜들었다가 의자 위에 콱 내리 꽂았다. 칼날은 깊숙이 박혀 좌우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조양은 청구의 땅이다. 그리고 이 땅의 사람은 모두 청구 백성이다.
덕이는 다시 돌아서더니 잠깐 억제하고 있다가 일시에 봇물이 터지듯이 아름이의 어깨 의로 쏟아져 들어갔다.
여보, 나요.
갓난 아이가 큰 소리로 울어댔고 아름이는 두 어깨를 잡힌채로 놀라서 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갈래말 수장 큰돌의 아들 덕이요.
여…여보.
그제사 아름이는 손을 올려 덕이의 얼굴을 더듬었다.
얘들아.
하면서 덕이가 동생들과 누이에게 팔을 벌리자 그들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엉켰다.
이튿날 천호장 검바우와 천호장 온수리의 전령이 달려와 서남방의 초원에서 조양으로부터 쫓겨간 동호의 패잔병들이 섬멸되었다는 것을 알려왔다. 동호의 큰 한은 필마단기는 아니었으나 불과 백여기의 친위 병력에 싸여서 간신히 초원 깊숙이로 달아났다는 전갈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초원의 곳곳에서 동족들을 만나 세가 불어난다 하여도 이미 주력이 꺾였고, 더구나 요충지인 하얀 이리를 빼앗겨 유족과 발족의 경계 너머로 멀리 가서 수년간을 기다려야 전과 같은 강대한 세를 이룰 것이었다. 그들은 대훙안령 기슭이 열하 구릉지구와 맞닿는 적봉의 황막한 고장에서 다시 북방으로부터 모여드는 유목부족의 새로운 집결을 기다리게 될것이다. 그러나 유와 발파 청구는 이제 연합 세력이 되어 예와 맥 당의 동북부에 걸쳐서 대릉하의 하류지역에 이르기까지 세를 뻗을 터였다.
청구의 원정군은 아직 메마른 조양의 초원과 숲에 불을 지르고 근거지를 모두 쓸어버리고나서 노획한 병장기와 가축과 식량과 털가죽 등속의 전리품을 거두어 일단 말모루로 돌아갔다. 물론 동호의 땅에서 생겨난 천여 병력과 검바우의 천여 군사를 하얀 이리의 요새에 남겨두고 왔는데 특히 동호의 사정에 밝은 그 고장 출신의 새 전사들은 동호의 작은 마을 집단들을 쫓아내고 북방으로 밀어 붙이는데 매우 유용하였다. 말모루 애터는 벌써 큰 성읍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먼저 정착한 하호의 가족들은 남아서 숲을 태우고 땅을 갈아엎어 새로운 농경지를 이루어 씨앗을 뿌렸고 아직도 개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 수공업을 할수 있는 크고 번듯한 맞배집이 세워졌다. 온갖 그릇과 항아리 등속을 구워내는 토기 가마가 생겼고 하얀 이리에서 실어온 구리돌을 다룰 풀뭇간도 세웠다. 이제 말모루 애터는 북방 청구의 중심 대처로 변하여 달마다 큰 저자가 벌어졌다. 덕이는 안해 아름이와 두 아들을 얻었고 세 형제를 다시 만났다. 그러나 덕이는 예전의 작은 수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박사겸 상인 설과 또 하나의 상인 다루는 그가 한에서 큰한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유와 발과의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였다. 위의 두 부족이 복속하여 온다면 천하에 흩어진 밝 족의 모든 대읍에 이 사실을 알릴 터였다. 그러나 덕이는 아직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힘이 생겨나면 자연스레 청구를 넘어서 다른 부족들 사이로 전해질것이며 부족의 모임을 통하여 큰한으로 뽑히는 것이 실상의 힘이 될것이라 여겼다. 그가 듣기로도 조선족의 선비군을 이끌고 있는 한배는 큰한 중의 큰한인 검에 오를 진정한 힘이 있으면서도 위로 검단웅을 모시고 아래에서 섭정으로 머물러 있다지 않은가. 또한 청구의 대읍을 점령하고서도 다만 세습되던 자를 갈아 치우고 화백모임을 회생시켜 그 모임에서 뽑은 호족으로 새로운 한을 세워두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는 천하의 인심을 잘 다스려 나가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이미 조선족의 대권을 잡았고 나아가 고죽과 청구에서 호족의 세를 꺾고 선비군을 재편성 하였던 터였다. 아무리 덕이가 새로운 세력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제 겨우 청구 북방의 마을 연합들을 그러모으고 위로는 동호의 요새지 두군데를 평정한데 지나지 않았다. 군사는 동호 파견군 이천과 애터와 갈래강에 걸쳐서 진을 친 사천여 군사가 있었다.
그러나 비장 홀이 지휘하는 친위병 천여명이 가장 무용이 날랜 군사들이며 그들은 예 땅에서부터 하호군으로 백전을 겪은 자들이라 군율이 엄정하게 서있었다. 나머지 삼천은 마을 연합의 사방에서 그러모았던 젊은이들인데 아직 날랜 군사라고 할수는 없었다. 비록 동원 체제가 빠르게 갖추어졌다고는 하나 그들은 아직도 직업 전사는 되지 못하였다. 덕이는 내부의 산물을 풍족하게 일으키는데 다루가 더할수 없이 필요했지만 우선 유족과 발족을 더 굳은 맹방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다루를 사신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다루가 다녀오고 나서 그쪽에서도 사신을 보냈고 서로의 물산이 오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예와 유족의 당에서 일어난 갖가지 기술이 청구 당에 활발하게 번져갔는데 무엇보다도 누에를 치고 고치에서 실을 빼어 옷을 만드는 것이며 마에서 베를 짜내는 술법이 중요한 것이었다.
난하 유역의 복식과 두건이 그대로 북방으로 번져갔다. 또한 다루는 많은 청구 사람들에게 구리를 녹여서 무기를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 구리돌뿐만 아니라 그것을 단단하게 하고 제마음대로 모양을 내게 하려면 푸른돌과 흰돌을 함께 써야 하는데 이러한 산 또한 강가에 면한 벼랑 가에 노출되어 있기가 십상이었다. 가마는 돌과 흙으로 지었는데 뒤쪽에 바람 구멍을 내고 불 때는 아궁이를 터놓고 편편한 돌을 내부에 ,깔아 열을 받게 하며 가운데에 구리물이 흐르는 구멍을 뚫어둔 다음에 발로 가죽부대를 밟아 바람을 넣으면 목탄이 타서 편편한 돌위에 놓았던 구리돌이 녹아 흘러서 구멍으로 빠진다는 것이었다. 물을 뿌려서 식혔던 구리를 같은 방법으로 녹인 청돌과 백돌에서 뽑아낸 푸른쇠·흰쇠를 섞어서 토기에 넣고 다사 불을 때면 녹아서 섞이는데 이때에 준비했던 칼모양, 화살촉 모양, 창날 모양의 모랫돌이나 활석에 새긴 거푸집에다 쇳물을 붓는 것이었다. 물에 담가 식힌 뒤에 돌망치로 두드러 다듬고 또 약한 불에 달구었다가 두드리기를 연거푸 해내면 훌륭한 청동기가 제작되었다. 다루가 가르친 많은 공쟁이들은 무기외에도 장식이나 마구나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창날이나 화살촉은 예리해서 좋았지만 동검의 경우에는 짧은 칼이 유효했고 긴것은 곧잘 휘어지거나 부러지거나 하였다. 칼날의 가운데를 두껍고 넓적하게 벌린 것은 상처부위를 더욱 치명적으로 찢어 놓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보다 중요했던 것은 휘어지는 것을 막고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해 가을에 처음으로 개간지가 실측되고 소출이 정확하게 알려져서 비로소 조세의 내역과 그 많고 적음이 결정될 수 있었다. 이때에 청구 애터에서는 덕이와 박사겸 상 설, 또 다른 상 다루가 세사람의 제사장이 되어 애터가 생긴 이래로 처음인 큰 제사를 지냈다. 제주는 덕이였고 박사 설이 제를 끌고 나갔으며 다루가 제수며 인원을 통솔했다. 그들은 신시 이래로 전해진 청동으로 만든 징과 작은 쇠, 그리고 큰북과 천지북, 긴 피리 짧은 피리, 또한 세줄짜리 줄북과 여섯줄 짜리 줄북등의 악기를 앞세워 풍악을 잡히면서 애터의 성곽 가운데 높이 쌓아올린 제단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구리로 만든 징은 해요, 작은 쇠는 별이요, 큰북은 달이요, 천지북은 사람이요, 긴 피리는 기요, 짧은 피리는 정인데, 삼육의 줄을 퉁기는 줄북은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내는 사람의 살이를 나타내는 것들이었다.
다섯 방향과 세상 만물을 뭉친 다섯가지 사물과 오한 오가를 나타내는 청적황백흑의 깃발을 치켜들며 나아가고 남녀 백성들은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추며 나아갔다. 제단 위에는 소와 돼지를 잡아 그 목을 모양살려 올려 두고, 중앙에는 포로로 잡혔던 동호의 백장 하나를 정갈하게 옷입혀 손발을 뒤로 묶어두고 하늘을 향하여 가슴을 벌리고 있는듯이 해두었다.
풍악이 한참 고조되고나서 뚝그치자 덕이가 가운데에 서고 좌우로 설과 다루가 섰는데 각각 양손에 검을 들었다. 덕이가 먼저 제단에 세번 절하고 다시 나아가 여섯번 머리를 조아리니 이는 지극하게 섬기는 고래의 예였다. 덕이가 꿇어앉아 하늘에 고하기 시작하였다.
높은 하늘너머 한님이시여 저 아득한 땅 속 깊이 검님이시여 천지에 가득한 정기로 우리가 사람되어 태어났으니 이제 그 셋을 꿰뚫어 잇는 굿을 올리나이다.

<그림 강행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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