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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자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1894년 7욀 어느 날 파리주재 독일대사관의 무관 「슈바르츠·코펜」대령에게 한 방문객이 찾아 왔다. 레종도뇌르의 빨간 리번이 오버코트 깃을 장식하고 있는 이 방문객은 아내의 병구원을 위해 스파이가 될 것을 자원했다. 헝가리 출신의 프랑스군 소령 「에스테리지」백작이다.
서양사의 한 페이지를 감동적으로 장식한 「드레퓌스 사건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프랑스군 참모본부에 근무하던 유대 계 포병대위 「드레퓌스」는 독일 측에 군사정보를 팔았다는 간첩혐의로 체포된다. 비공개 군법회의에서 종신형을 받고 남미의 고도로 유형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국민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진실은 영원히 은폐시킬 수 없다. 사건의 내막을 잘 알고있는 한 성실한 동료장교에 의해 이 사건은 3년뒤 다시 점화된다.
프랑스의 양심적인 정치인, 문인, 법률가들은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재심을 청구하지만 법원에서 번번이 기각해 버린다.
당대의 대작가 「에밀· 졸라」가 드디어 펜을 들었다.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난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한다.」 로로르지에 쓴 이 공개장은 「드레퓌스」사건을 재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진실은 밝혀지고 「드레퓌스」는 무죄로 풀려나 복권된다. 구속 된지 12년만에-.
그러나 이 사건이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에 엄청난 충격과 파문을 준 것은 진실은 하나의 당위로서가 아니라 싸워서 찾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진실을 세상에 알려준 데 있다.
그뿐 아니라 이 사건은 법과 재판의 공정성 문제를 부각시켰다. 「드레퓌스」 가 종신형을 받은 19세기말 프랑스 법정은 법이 올바르게 적용되지 않고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 사건은 또 개인의 인권과 국가안보라는 문제도 제기했다. 당시 프랑스는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쓰라린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국가방위가 모든 것에 우선 한다는 정치적 주장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드레퓌스」를 유죄로 몰고 간 군부의 위신을 실추시킬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인들은 프랑스의 토대와 방위, 공화국의 이념을 구현하려면 무엇보다도 공정한 재판, 정의, 진실, 인권을 존중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 확신, 즉 진실과 정의가 승리한 것이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새로운 진상이 땅속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세상에 알려졌다. 진실은 어떤 것으로도 은폐될 수 없다는 그 진리를 모든 산 사람에게 깨우쳐 주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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