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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일자리 흔드는데, 노동시장 개혁은 선택 아닌 필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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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미국 2위 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최근 2년 동안 전체 지점의 10%(539개)를 폐쇄했다. 직원 수만 명(15%)이 은행을 떠났다. 이처럼 단기간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한 이유는 딱 하나, 산업환경이 바뀌어서다. 모바일과 인터넷뱅킹이 활성화돼 창구를 찾는 사람이 크게 줄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노동 보고서
근무시간·임금 정비례 시대 끝나
감성·사회적 스킬 필요한 일 늘어
기계가 일자리 대체하면 인력 과잉
여성·반퇴세대 지원, 외국인력 관리
정규·비정규직 이중구조 해소해야

한국이라고 다를까.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5년 26%를 차지하던 은행창구 거래비중이 올해 3분기엔 10.1%로 확 떨어졌다. 이에 따라 은행도 인력을 줄이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8월 원주시에 미래형 점포인 ‘스마트브랜치’ 1호점을 개설했다. 이 지점은 세 개의 창구 가운데 한 곳에만 직원이 있다. 나머지 창구엔 무인 셀프뱅킹 기기인 ‘스마트 라운지’를 배치했다. 신한은행은 인천과 서울 홍대입구에도 스마트브랜치 2호, 3호점을 운영 중이다. 내년엔 전국 기반으로 스마트라운지 도입을 확대할 계획이다.

흔히 인공지능(AI)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4차 산업혁명이 경제 전반에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제조업과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을 통해 생산·유통 방식이 확 바뀌면서 고용시장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금융·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직장인의 82%는 “4차 산업혁명이 일자리를 감소시킬 것”이라고 걱정한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올해 7월 직업별로 1006명을 조사한 결과다. 나머지 직군에서도 두 명 중 한 명은 일자리가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근로시간만 채우면 임금을 받는 기존 고용시장의 형태가 업무의 강도와 수행 정도에 따라 대가를 지불하는 형태로 바뀌고, 그나마 기계로 대체되는데 따른 현상이다.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노동시장 전략연구회 연구결과 발표회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분야별 전문가 54명이 8개월간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 나왔다. 우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컨베이어벨트처럼 매뉴얼에 따라 일하면 제품이 나오는 작업은 모두 자동화될 수 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 가 보면 위험작업은 100% 자동화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산업재해도 확 줄게 된다”며 “이걸 노조가 일자리 보전 차원에서 막고 있어서 실행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단순 생산직으론 승산이 없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면 노조의 우산 역할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회사가 추구하는 고용 관계가 ‘생산품 만들기(to make)’에서 ‘업무 구매하기(to buy)’로 바뀌기 때문이다. 예컨대 신제품 디자인을 내부 인력에 맡기지 않고 외부 공모를 하는 형식으로 수행하면 훨씬 효과적이다. 전문 디자이너를 굳이 고용할 이유가 없어진다. 회사에 얽매인 직원은 자연스럽게 준다. 이런 시대엔 개인별로 전문성을 갖춰야 일거리를 맡을 수 있다. 기업이 아닌 개인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이 경쟁은 글로벌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대신 근로자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근로시간이나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

대신 감성이나 사회적 스킬(skill)이 필요한 일은 증가한다. 가상현실전문가, 로봇윤리학자 첨단과학 산업분야와 동물매개치료사, 범죄예방환경전문가와 같은 삶의 질이나 공공안전분야 직업이 이에 해당한다. 미래 세대가 노려볼 만한 직업이다.

여성이나 반퇴세대(장년층)의 경우는 4차 산업혁명 진행으로 설자리가 좁아질 수 있다. 전략회의에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와 출산율을 동시에 높이기 위해 모성보호제도를 리모델링할 것을 주문했다. 시간제와 전일제를 택할 수 있도록 법제화하고, 모성보호급여를 재원이 빠듯한 고용보험 대신 정부 일반회계나 건강보험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또 장년층을 위해선 직업훈련을 강화하고, 파견업종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했다.

무분별한 외국인 근로자 유입에 대한 경고도 나왔다. 조만간 기계로 일자리가 대체되면 인력 초과 공급이 빚어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급격한 임금감소를 초래할 수 있다. 전략회의는 “직종과 숙련 정도에 따라 외국인 근로자를 통합관리하고, 재외동포(F-4) 비자에 대한 제어 등 외국 인력의 유입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F-4 비자의 경우 다른 비자와 달리 노동시장 유입을 통제할 수 없다.

근로가 가능한 사람을 위한 공공부조(실업부조) 도입도 권했다. 공공부조는 실업급여 만료자, 청년 실업자, 자영업자와 같은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훈련·취업과 연계해 생계수당을 지원하는 제도다. 최저임금과 근로장려금(EITC), 공적부조를 연계해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생계를 보장하는 원칙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는 권고도 나왔다.

이날 전문가들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충격을 줄이려면 노동시장을 시대에 맞게 개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남성일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불합리한 격차가 심각하다”며 “이런 경직성과 이중구조는 4차 산업시대의 기술혁신 과정에서 적응을 지체시켜 부정적 충격을 심화시키고,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기찬 고용노동선임기자 wol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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