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증뿐인 수사발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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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3일 하오 7시쯤 경기도화성군태안읍 화성경찰서 치안지서.
부녀자 연쇄피살사건 수사본부에서 수사책임자가 취재진들에게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이 점찍은 이마을 홍모씨(42)에 대한 일방적인 수사발표를 하고 있다.
『용의자 부인의 진술에 따르면 홍씨는 변태성욕자이고…』 『남편과 자식을 팽개치고 가출한 아내의 진술을 전적으로 믿어도 됩니까.』
취재기자의 반문.
『홍씨집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손칼과 손전등이 발견되었고…』
『웬만한 가정집에 그런 물건은 다 있는 것 아닙니까』 경찰간부는 취재진의 잇단 질문에도 아랑곳없이 홍씨가 범인임을 자술했는데 그이상 무슨 의문이 있겠느냐며 볼멘 소리.
『더구나 홍씨는 평소 성격이 신경질적이고 코가 큰데다 잔인하며…』
『아니, 코가 큰 것과 잔인한 성격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심증은 확실한데 물증이 없다는 경찰의 억지 발표에 폭소가 터진다.
경찰이 홍씨를 연행한 것은 10일밤.
평소 다니던 다방에서 종업원들에게 반농담조로 사건과 관련된 얘기를 했다는 사실 하나가 연행이유의 전부.
그뒤 경찰은 다른 용의자수사조차 팽개친채 4박5일간 홍씨를 조사하면서 얻어낸 것이라고는 세차례 범행을 시인했다는 자술서뿐.
그밖에 연하의 20대 청년과 눈이 맞아 가출한 부인의 진술과 홍씨 집에서 찾아낸 손칼등이 증거물로 제시됐다.
『홍씨가 진범이라면 왜 구속을 않습니까』
『글쎄 뚜렷한 직접증거가 없어서….』
『그렇다면 풀어줘야지, 5일째 붙잡아 두는 것은 불법구금 아닙니까』
예의 임의동행론을 펴며 펄쩍 뛰는 경찰간부는 10여분만에 각본에 짜맞춘듯한 수사발표를 서둘러 끝냈다.
같은 시각, 수사본부에서 3백m쯤 떨어진 홍씨집 대문 앞.
국교 2, 5년생 두아들이 배고픔을 참으며 언제 돌아올지 모를 아빠를 기다린다. 『우리 아빠가 나쁜 일을 했나요. 아빠가 와야 밥을 해먹는데 며칠째 라면만 먹었어요. 형은 라면밖에 못끓여요.』<화성=최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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