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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가려진 시간'을 읽는 두가지 시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실종된 소년이 몇 주 사이 훌쩍 자란 청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엄태화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가려진 시간’(11월 16일 개봉)은 ‘시간이 멈춘 세상’이라는 판타지적 설정을 극의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갑자기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년 성민(이효제·강동원)과 첫사랑 소녀 수린(신은수)의 교감을 풋풋하고 애절하게 그려 냈다. 전작 ‘잉투기’(2013)로 현시대 청춘들의 풍속도를 조명했던 엄 감독. 그가 시간이 정지한 판타지 공간과 현실 세계를 오가며 풀어낸 이야기는 과연 무엇일까. 두 필자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가려진 시간’에 대해 말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촘촘한 플롯으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다

첫 장편 ‘잉투기’나 이전의 단편 ‘숲’(2012)에서도 느꼈지만, 엄태화 감독이 텍스트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특히 플롯을 구성하는 방식에서 놀라운 솜씨를 보여 준다. 시간대가 뒤섞이고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한 ‘숲’은 마치 관객과 게임을 벌이는 듯하다. ‘잉투기’는 ‘인터넷’이라는 가상 공간과 현실 세계를 능수능란하게 오간다. 그의 두 번째 장편 ‘가려진 시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여러 겹의 서사를 통해 하나의 이미지에 도달한다. 그것은 ‘가려진 시간’의 모티브가 되었던, 거대한 파도 앞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이다. 친구였던 두 아이는 소녀와 성인의 모습으로 멈춰진 시공간 속에 들어간다. 영화는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내러티브 전략을 보여 준다.

‘가려진 시간’은 마치 과거 범죄 사건을 파헤치는 장르영화처럼 시작한다. 극 중 등장하는 ‘화노도 아동 납치 사건’이 그것이다. ‘수린’이라는 한 아이의 내면을 난도질해 놓은 사건으로, 아동심리학자 민경희(문소리)는 아이로부터 그 사건 이면의 이야기를 듣는다. 엔딩 부분에 민경희가 수린에게 『가려진 시간』이라는 책을 건네주기까지, 이 영화를 이끄는 건 수린의 내레이션이다. 여기서 영화는 ‘내레이션 속 내레이션’ 방식을 사용한다. 초반에는 수린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고, 어느 시점부터 성민의 내레이션으로 전환된다. 그래서 ‘가려진 시간’의 내러티브에는 두 사람의 관점이 투영된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는 믿기 힘들다. 아이였던 성민이 멈춰진 시공간 속에서 성장해 어른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수린은 그 이야기를 민경희에게 들려준다. 이렇듯 ‘가려진 시간’은 두 세상의 충돌이다. 아이들의 실종 사건을 둘러싼 현실적 세계가 있다면, 수린과 성민만이 통하는 언어로 기록된 세계도 있다.

엄 감독이 ‘가려진 시간’에서 거둔 가장 큰 성취는 그가 만든 세계의 영화적 완결성에 있다. 영화를 만드는 행위가 궁극적으로 ‘상영 시간’이란 한계 속에서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라면, ‘가려진 시간’만큼 이 명제에 충실한 영화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 영화는 꼼꼼한 내러티브 전략을 통해, 말도 안 되는 시공간의 세계를 매우 그럴듯하게 꾸며 관객을 설득한다. 시간이 멈춰 버린, 그래서 이상한 중력이 작용하고 물리적 법칙마저 붕괴된 시공간을 인상적인 운동성과 이미지로 담아낸 것이다. 그 낯선 느낌에 관객은 곧 익숙해지고, 그 안에서 아이들이 겪는 일도 쉽게 받아들인다.

이것은 간단히 성취되지 않는다. 촘촘한 플롯 구성이 필요하다. ①민경희가 수린의 이야기를 듣는 현재, ②수린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경험담, ③성민이 그들만의 언어로 기록한 멈춰진 시공간에서의 일. 이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속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 점증적 긴장감은 역순으로 해소된다. ③의 세계에서 벗어난 어른 성민이 수린을 찾아오고, 수린이 성민의 기록을 읽으며, 그 사연이 끝나면 다시 ②의 세계로 돌아가고, 그 후에는 상담실이 배경인 ①의 시간대로 돌아온다. 순서를 살펴보면 ‘가려진 시간’은 ‘① → ② → ③ → ② → ①’로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③-1’이다. 수린과 성민은 경찰에 의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성민은 다시금 시간을 멈추기 위해 두 번째 알을 깬다. 그의 바람대로 결국 시간은 또다시 멈춘다. 이때 ‘가려진 시간’의 모티브였던 그 이미지가 등장한다. 마치 판타지처럼 제시되는 ‘파도 앞의 두 사람’이다. 이전까지 켜켜이 쌓인 서사의 겹은 이 장면에서 배경으로 작용하며 울림을 준다. 마치 화룡점정처럼, 이 이미지를 통해 복잡한 텍스트가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하는 순간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린과의 대화를 토대로, 민경희는 모든 이야기를 책 『가려진 시간』으로 정리한다. 이를 받아 든 수린은 섬으로 돌아가는 배에서 중년이 된 성민과 스친다. 그러면서 이 영화는 끝남과 동시에 다시 시작한다. 그렇게 이어질 이야기는 책을 벗어난 것이며, 관객에게는 여운으로만 남을 그들만의 이야기일 것이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시간과 함께 멈춰 버린 서사의 흐름

영화의 출발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엄태화 감독은 “성인 남자와 소녀가 나란히 거대한 파도를 바라보는 그림에서 ‘가려진 시간’의 모티브를 얻었다”고 했다. 이들에게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가려진 시간’은 이 질문을 복기하려는 엄 감독의 상상이자 해석이다. 어린 성민과 친구들은 시간 요괴의 알을 깨뜨린 후 시간이 정지된 세계에 고립된다. 발파 공사로 산을 훼손한 어른들이 ‘아동 실종 사건’이라는 재앙을 맞닥뜨렸듯, 아이들 역시 멈춰 버린 시간 속에서 경솔하게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형벌을 받는다. 시간이 다시 흐른 뒤, 훌쩍 어른으로 자란 성민을 믿고 알아보는 사람은 성민의 첫사랑 수린뿐이다. 수린을 제외한 대부분의 어른들은 그를 유괴범 내지 소아성애자로 매도한다. 성민의 친구이자 첫사랑 상대, 더 나아가 보호자로서 수린은 그런 날카로운 시선으로부터 그를 지켜 내려 고군분투한다. ‘가려진 시간’은 나이 든 성민과 어린 수린의 교감을 통해, 아마도 영화 속 세상에서 가장 외로울 한 커플이 겪는 수난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렇다면 여러 겹의 시간대와 서사를 갖춘 ‘가려진 시간’이 정교하기보다 단순하게 느껴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애초 엄 감독을 매료시킨 한 장의 이미지, 즉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 장면에 도달하기까지 상영 시간의 여백을 채우는 서사가 헐겁기 때문이다. 극 중에 등장하는 시간이 멈춘 세상은, 비록 과학적·창의적 묘사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생명력을 잃어버린 세계’라는 점에서 무척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초반부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던 내러티브가 어느 순간 정체되고 있음을 느낀 것은, 다시 시간이 흐르면서부터다. 어른이 된 성민과 여전히 소녀인 수린이 재회하면서, 이 영화는 둘 사이에 흐르는 기묘하고 아련한 공기를 캡처해 기록하는 데 몰두한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성민이 수린의 모습을 비누로 깎아 조각했던 것처럼, 영화 밖에서도 이야기를 멈추고 정서만을 박제하려는 시도가 일어난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10월 26일 개봉, 스콧 데릭슨 감독)에서 영겁의 시간을 지배하는 악당 도르마무는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의 기지로 아이러니하게 찰나의 순간에 갇힌다. ‘가려진 시간’의 엄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감독이 종횡무진 다스릴 수 있는 영화 속 방대한 타임라인에서 스스로 한순간에 갇히기를 선택한다. 미스터리로 시작한 이야기는 10대 판타지영화나 정통 멜로드라마, 어느 쪽으로도 물줄기를 뻗어 나가지 못하고 그대로 웅덩이에 고인다. 전작 ‘잉투기’에서 그랬듯, 엄 감독은 소재의 매력을 스크린에 맞춤하게 투사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말하려는 메시지가 서사를 통해 와 닿지 않기에 뒷심을 잃어버렸다. 정물화처럼 고정된 채 정서의 결을 부각시킨 이야기는 지루함을 안긴다. 이런 구성상의 부작용은 캐릭터 활용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수린의 의붓아버지 도균(김희원)과 아동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백기(권해효)를 제외하면, 어른들은 그저 성민과 수린을 위기로 몰아넣기 위한 극적 장치 혹은 배경에 가깝다.

캐릭터보다 풍경에, 서사보다 정서에 힘이 실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무엇이 남을까.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완결됐을 때 느끼는 포만감이라기보다, 한 폭의 그림을 바라보며 느낄 법한 즉흥적 감상에 더 가깝다. 강동원이라는 검증된 피사체, 극 전반에 흐르는 신비하고 애잔한 분위기조차 서사를 대체해 영화를 이끌기엔 역부족이다. 한편 이 영화 속에서 반복되는 ‘물’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처럼 ‘가려진 시간’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뒤집어 보면 이야기 자체만으로 논의를 확장할 만한 화두가 빈약하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이야기의 결을 잘 정돈했으나, 결코 치열하지 않은 129분. 이 영화에 대해 ‘독특하다’ 말할 수는 있어도, ‘독창적’이라 보기는 힘든 까닭은 바로 그래서다.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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